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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목하라 Oct 17. 2020

헤밍웨이 / 킬리만자로의  눈

한 허무주의자의 죽음




헤밍웨이는 아마도 지독한 허무주의자였지 싶다. 그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을 다시 읽으며 헤밍웨이가 잡혀 있는 생은 무엇이었을까?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내 주위에 한 사람의 다른 허무주의자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와 나눈 죽음이 무엇일까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을 다시 들여보게 했다. 책 속의 주인공 해리는 삶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고 사냥을 즐겨했으며 어딘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사냥꾼처럼 찾아 헤맸다. 어느 곳도 어느 것도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는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두 가지 '사냥과 여자'를 곁에 두고 죽음을 맞는다. 이 책은 그가 죽음의 순간을 맞는 사유에 대한 이야기이다.

허무를 가진 자들은 공통적으로 몸부림이 강하다. 자신의 늪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게 치열했던 몸부림도 결국 허무로 오는 것이 이들의 운명이다.

킬리만자로는 해발 19,710피트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그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응가예 응가이", 즉 '신의 집'이라고 부른다.  서쪽 봉우리 가까운 곳에 얼어서 말라붙은 표범 사체가 있다. 이 표범이 무엇을 찾아 그 높은 곳까지 왔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킬리만자로의 눈 / 첫 문장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인간은 무던히도 애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나, 두 번 경험될 수는 없다. 사후의 세계는 말할 수도 없고 전해 들을 수도 없다. 오직 한 번. 당신 생에 한 번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 헤리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남자는 사냥을 위해 간 아프리카에서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괴저에 걸린다. 소설의 시작은 극심한 통증이 사라지고 죽음이 다가온 시점이다. 구조를 위해 비행기가 오는 아침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앞에 둔 심리적 상태는 '통증이나 공포'가 아니라 '피로와 분노'였다. 죽음의 순간에 대해 생각한다. 삶의 희열과 열정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살아있어도 산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한 허무주의자의 말은 진짜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것이라는 걸 나는 어쩌면 엄마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며 느꼈다.

삶을 끝없이 사랑했던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는 억척스러웠다. 가난과 싸워야 했고 사람 좋은 아빠와 먹고사는 문제로 싸워야 했다. 다섯이나 낳은 자식들의 입에 밥을 넣어줘야 했기에 바가지를 들고 이웃집에 쌀을 빌리러 가기도 했다. 아마도 그 순간이 꽃 같은 엄마를 억척어멈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남편의 간 건강을 위해 이른 새벽 남의 집 미나리꽝에 가서 미나리도 살짝 베어 와야 했다. 주인이 특별히 없는 마을 길가의 쇠무릎 뿌리 같은 풀들은 늘 처마 밑에 말려 있었다. 이렇게 살면서 삶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냐고 나는 의심했다. 그런데 엄마는 몸에 퍼진 암덩어리와 생의 마지막 사투를 벌이는 현장에서 말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원도 없고 한도 없다. 나는 다 이루었다.'라고.
생각해 보면 엄마는 그랬다. 뜨겁게 생을 살았고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죽음의 영이 머리맡에 왔을 때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끊임없이 움직이고자 했다. 다리 힘이 빠지는 순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때도 일어섰다. 간병을 하며 잘 수 없었던 자식들과 고용된 간병인과 병원의 간호사들도 제발 잠자기를 청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고집스럽게 움직였다. 병원 복도에 서서 졸기를 반복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도 환각에 시달리며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 겨우 누이면 다시 일으키기를 수십 번씩 반복시켰다. 자는 시간을 가장 끔찍해했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 그녀는 허공의 무언가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그림자를 처음 본 아이가 그림자를 잡으려는 손짓 같기도 했다. 엄마는 결국 미음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마지막 숟가락을 넘기는 순간 기도로 음식물이 들어가 숨을 거두었다. 장의사는 염하기에 참 깨끗한 상태라 했다.

헤밍웨이와 다르게 투쟁적 인간상을 구현하려 했던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


그는 말했다. 죽음이란 잠이 드는 순간과도 같다고.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날 수 없으면 그것이 죽음이지 않겠느냐고. 엄마를 보낸 지 얼마 안 된 그는 아직도 엄마와 애도의 시간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건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하다. 아직 삶의 순간에 있는 이들이여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늙고 병들고 열정이 사라진 삶 속에서도 우리는 건너야 할 강이 있고 먹어야 할 양식이 있다.

이제 다 끝났군, 해리는 말한다. 이제 나 스스로 끝장을 낼 기회는 결코 오지 않겠군. 그냥 이렇게 끝나는 거야. 오른쪽 다리에 괴저가 시작된 이후로 해리는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호기심도 사라졌다. 오랫동안 이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이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냥 적당히 피로해지는 것만으로도 쉽게 이렇게 될 수 있다며 신기해했다. 이것은 헤밍웨이가 살면서 끝없이 생각했던 죽음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삶의 허무를 아는 사람은 죽음도 그 삶의 연장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저 눈을 감고 다시 뜨지 못하면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일매일 죽고 아침이면 다시 사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엄마는 죽음의 끝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했다. 원도 한도 없이 한 생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러나 딱히 거짓말을 한다기보다는 말할 진실이 없는 쪽이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 23p

소설 속 그녀는 그가 사는 삶을 부러워했다. 그녀는 그가 쓴 글들을 좋아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통해 새로운 삶을 구축해 나가고, 그는 자신의 남은 것들을 비워내며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부자였고 유쾌했고 즐길 줄 알고 말썽을 피울 염려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구축한 삶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말할 진실들이 하나 둘 두 사람의 공기 속을 빠져나간다.
이제 사냥은 다 끝났다. 어쩌면 우리 생은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있기에 눈뜨고 있는 동안에는 가져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믿는 것을 배반하고, 술을 너무 마셔 지각의 날을 무디게 하고, 게으름, 태만, 속물근성, 자만심과 편견. 어떤 식으로든 기어코 자신의 재능을 파괴해 버린다. (25P) 그에게 가능했던 시간들은 늘 과거였고 과거는 그를 한계로 치닫게 했으나, 결국 죽음 앞에 이른 그를 회복시킬 아무런 힘이 없다. 스스로 그 힘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사랑하게 했던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헤밍웨이의 삶을 생각한다. 태생적 전형성을 이기려 몸부림치고 살았을 그의 생에 연민이 생긴다. 누구도 그 삶의 허무를 이겨내지 못하리라. 그만큼 그의 생은 위대했다. 죽음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평소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그 높은 얼음절벽이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걸 알고 갔을까? 모든 행위가 허무로 종결되게 하고 싶지 않다. 끝끝내 앉아서 유명을 달리한 내 어머니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는 자유다.'라고 말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가 끝끝내 서서 죽음을 맞는 것처럼. 생은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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