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 보드카를 성공적으로 마시고 온 후 한국에서 보드카 기행에 나섰다. 나서려고 했던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나라는 사람은 원래 계획 같은 것이 별로 없고, 계획해도 실천하는 법이 별로 없다. ‘별로’가 강조된 것은 간혹 하기는 하지만 흥미를 잃고 끝날 때 변명처럼 옹알거리는 나의 가벼운 후렴구이다.
낯선 사람을 보면 얼굴부터 굳어지고 낯선 장소에 가면 내가 주인공이든 손님을 접대해야 하는 순간이든 떠날 궁리만 한다. 보드카는 나에게 낯선 술이다. 그런 내게 특별한 호기심이 생겼다. 심지어는 ‘벨루가’라는 흰고래에 대해 검색하다가 ‘벨루가 보드카’에 마우스가 클릭 되는 어이없는 경험도 했다. 신기하게도 주점에 가서 앉기만 하면 보드카라는 이름이 3배 확대되어 보였다.
나도 이 집의 ‘보드카 사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자리했다.
처음은 혼자서 간 2박 3일간의 서울 교육에서였다. 철들고 나서 서울역이 처음인 나는 지하철도 찾지 못했다. 나의 직진 코스에는 다행히 화장실이 있었다. 우선, 마음을 다스리고 앱을 검색했다. 분명 4호선 공덕역으로 표기된 지하철 노선표가 나와야 하는데 공항철도와 경의중앙만 있다.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공항철도인가? 경의중앙인가? 망설일 시간이 없다. 노란조끼 할아버지의 안내를 받아 겨우 지하철을 탔다. 어찌어찌 도착한 공덕동의 지방행정연수원.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내가 맨 앞자리를 선호하는 이유도 낯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이다. 강사와 나만 보면 되는 맨 앞자리가 어느 날부터 좋아졌다. 절대 눈이 어두워지거나 귀가 잘 안 들려서가 아니다. 오전 교육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밥 먹으러 가라는 말이 없다. 등골이 오싹해 뒤돌아보니 강의실에 나만 남았다.
나는 점잖게 또박또박 걸어서 연수원을 나왔다.
나올 때는 한 길이었는데 나와보니 여러 갈래 길이다. 또 등골이 오싹해진다. 밥은 어디로 먹으러 갈까? 손바닥에 침을 뺏을 수도 없고.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거침없이 여러 갈래 길로 쏙쏙 잘도 들어간다. 그들은 다 계획이 있나 보다.
오거리에 선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세움 간판이 있었으니, 무겐 추천 주류 ‘보드카 사와’였다. 동공이 3배 확대되는 순간이다. 뭔가에 빨려 들어가듯 무겐이 자리한 지하로 직진했다. 일식집이었다. 점심 특선 메뉴는 가격도 저렴했고 생선 살이 두툼해서 먹기에도 좋았다. 무겐 추천 주류는 2가지인데, 보드카 사와와 오키나와 맥주였다. 둘 다 나를 유혹했으나, 익숙한 생맥주를 뒤로하고 낯선 보드카 사와를 시켰다.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잠시 자판 두드리기를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에 기러기들이 사이시옷으로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 그래, 이 맛이야. 공기를 가르고 세계가 이동하는 느낌. 달콤하면서도 쓴 맛이 있고 가벼우면서도 고급스러운 뒷맛을 지닌, 나도 이 집의 ‘보드카 사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자리했다.
욕망을 데리고 살면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두 번째는 군산의 ‘파라디소페르두또’이다. 천국과 낙원이라는 뜻이다. 천국도 좋은데 낙원이란다. 하여튼 과한 이름이 어울리는 파라디소는 내가 오랫동안 애정하는 맛집이다. 20년 지기 친구들은 과하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술이라는 윤활유와는 별개로 우리는 잘 돌아가고 또 잘 삐걱거린다. 험한 꼴도 많이 보며 살아온 가족 같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나에게 술 한 잔을 권한다. 그것이 나에 대한 예의이다. 이 집은 에딩거가 맛있는데 나는 낯설지만 익숙한 메뉴판을 다시 한번 본다. 오~~ 있다. 보드카.
아주 작고 심플한 세모 잔에는 투명한 보드카만이 찰랑거렸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나에게 온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가득 찼으나 잔의 크기는 터무니없이(?) 작다. 이건 성동일이 응답하라 1988에서 손 모양만으로 소주 마시는 소리를 기막히게 냈던 바로 그 장면처럼 마셔야 하는 술이다고 직감했다.
나는 과감하게 직감에 순응했다. 이거 한 잔에 5,500원인데, 소주로 치면 한 병 반값이네. 이런 생각이 입술을 적시는 순간 들었을지도 모른다. 식도를 타고 폐부를 지나 가슴을 쩌릿하게 하는 이 정확한 족적의 힘! 지나간 길은 한 길인데 서서히 온몸에 퍼지는 이 마약 같은 번짐의 힘은 무엇인가? ‘욕망을 데리고 살면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이것이 나의 모토인 만큼 오늘은, 딱 한 잔만이다. 너의 이름을 ‘딱! 한 잔’이라 명하노라.
음악을 술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곳에서 ‘윤기’ 있는 DJ를 만날 수 있다.
세 번째는 군산 지곡동의 ‘음악 이야기’이다. 이곳엔 매력적인 목소리를 지닌 DJ 부부가 계시다. DJ가 있는 음악다방은 20대에 다녀보고, 처음이다. 명맥을 잇는다는 것은 장인과 맞먹는 훌륭한 일이다. 음악을 술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곳에서 ‘윤기’ 있는 DJ를 만날 수 있다. 그날은 아주 특이한 주류메뉴를 만났으니, ‘김광석’이었다. 밑에는 아주 작게 보드카라고 쓰여 있었다. 나의 동공을 확대한 것은 김광석이라는 주메뉴가 아니라 보드카라는 보일락 보이는 작은 글씨였다. 오해는 마시라. 이 메뉴 하나만 김광석이라는 사람 이름이 붙었다.
- 아, 이건 뭔가요?
- 이건 블랙 러시안입니다. (부드러운 저음의 DJ)
- 블랙 러시안은 남자의 술인데……. 그래도 마셔보죠. (보드카니까)
얼음이 섞인 김광석은 잠시나마 남자의 세계가 독하고 춥다는 생각을 했다. 추운 남자들은 술로 가슴을 데우겠구나. 금세 뜨거워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녹아가는 얼음만 건져서 뜨거워진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얼음을 잔뜩 넣은 블랙 러시안은 차가운 것이 뜨겁다는 걸 알게 했다. 가는 곳마다 보드카 맛은 달랐다. 나의 보드카 기행은 아마도 계속될 듯하다. 지금은 추운 계절. 보드카를 마시기에 딱 좋다.
락지자!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즐기는 자’이다. 공자도 樂知子의 삶을 권했다. 그의 권면이 좋다. 술은 여럿이 마실 때 유쾌하고, 혼자 마실 때 고독함이 있다. 이 둘은 다 즐기는 것이니, 예를 지키고자 하셨던 공자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