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한 달 살기
다녀왔습니다, 한 달 살기 [배지영 작가] 리뷰
떠남을 동경했지만 나는 결국 세 평짜리 우리집 베란다 구석으로 세상 전부를 끌어오는 데만 성공했다. 겨우 이만큼 성공시키는데 내 온 생을 끌고 온 것이다. 다섯 뼘짜리 내 책상 앞은 시공간을 초월하게 하는 나의 세계이다. 은퇴를 맞이하면 나는 이 구석에서 피워낸 불빛을 방사하듯 어디로든 세어 나갈 것이다.
희망이 간절할수록 내 현실의 무게는 더 크다. 그래서 나는 배지영 작가의 <다녀왔습니다, 한 달 살기>를 즐겁게 읽지만은 않았다. 읽고 덮는 순간에는 마음이 무겁기까지 했다. 마치 내 인생의 파노라마를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책의 순서와는 달리 파노라마의 시작은 부모를 따라 지리산과 속초로 간 아이들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직은 삶이 미스터리 하기까지 한 스무 살의 청춘들과 직종을 변경하려 삶의 변곡점에 서 있는 사람, 한창 자기 일에 빛을 발하는 워크홀릭의 시기, 육아와 자아 사이에서 삶이 지쳐있는 시기, 그리고 정년을 맞이하는 은퇴기까지.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그랬다. 그것은 삶이라는 길 위에 선 한 사람의 삶과도 같았다. 내 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난 사람과 떠나지 못한 사람으로 홍해 바다가 갈라지듯 갈라서는 기적이 아닌, 현실이 보였다.
배지영 작가의 <다녀왔습니다, 한 달 살기>는 너무도 구체적으로 한 달 살기를 소개한다. 마음과 몸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모터를 달아준 기분이다. 세계를 내 안으로 끌고 왔듯, 이제 세상으로 나아갈 때가 머지않았으니, 그 마음만 변치 말라고 위로도 해줬다. 내 그림자 퍼즐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 나를 누구보다도 가볍게 만드는 날, 그때 홀가분하게 나에게 남은 것들만 안고 떠나면 된다.
작가가 인터뷰한 10명의 인터뷰자들은 각자의 지향점에 따라 익숙한 거주지를 떠나 낯선 도시에 살러 간다. 길 위에 서 있는 순간도 삶이다.
일을 하러 간 출판사 대표 안유정 씨와 작곡가 김민경 님은 각각 강릉과 완주로 간다. 이곳의 특징은 지자체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있다. 게스트하우스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하고 싶은 콘텐츠를 품고 간다. 다른 환경을 만나 창조적 사고를 하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가져오면 된다. 출판사 대표인 안유정 님은 <강원 작가의 방> 프로그램 참여자로 강릉에 살면서 책을 한 권 만들어 냈다. 워커홀릭이었던 그녀는 ‘무언가 해야만 꼭 의미 있는 인생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녀가 이곳에서 쓴 <연희동 편집자의 강릉 한 달 살기>는 30대 미혼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사는 곳과 가까워서일까? 작곡가 김민경 님은 완주문화재단의 마을형 예술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해 완주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문화 아지트 빨래터’에서 반려견과 함께 시작한 한 달 살기는 그녀를 그저 한 달에 머물지 않게 했다. 완주의 빈집으로 다시 거처를 옮겨 ‘예술 농부 프로젝트’를 완성한다. 그녀가 들려주는 동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정겹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을 동반한 힐링살이도 있다. 지리산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간 김현 님, 동해가 있는 속초로 아들 동해를 데리고 간 김경래 님. 그들이 그곳에서 삶을 회복해 가는 과정들은 나의 심리적 거리와 가까워서 많은 공감이 갔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우물쭈물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아이들은 오간데 없고 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아이들이 부모를 원하는 시기는 돌아보니 짧았다. 그러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시기라 부모에게도 충전이 필요하다. 그 시기를 자연에서 함께 보낸 김현 님과 김경래 님, 그들은 함께 있으며 서로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따뜻하다.
은퇴. 아직은 조기 은퇴를 꿈꾼다. 그만큼 나에게 은퇴는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중간한 곳에 있다. 나는 이들의 한 달 살기 중 아마 이 부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아직 꿈꿀 것이 남아있는 시기. 은퇴세대다. 자식을 키우고 돈벌이의 지겨움에서도 벗어난 그들의 한 달 살기는 그동안 고생에 대한 선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중학교 교사인 이은영 님, 32년 만의 장기여행을 한 박정선, 홍성우 님 부부, 방사선사 이희복 님. 그들이 보내온 제주의 바람과 길은 ‘원하는 삶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기꺼이 돈과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반짝이는 인생의 한 시기를 얻을 수 있다’라는 말에 위로를 받는다. 아직 오지 않은 길이니 충분히 꿈꿀 수 있어서 그랬다.
그런가 하면 삶의 전환점에서 타향으로 간 이들이 있다. 그동안 하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새로운 길로 가기 전에 군산으로 한 달 살기를 내려온 권나윤 님, 도시마다 한 달 살기가 삶이 되어 버린 이한웅 님. 아직 삶이 미스터리하지만 도전하고 있는 대학생 박혜린 님. 이들은 자신(self)을 찾는 일에 적극적이다. 도시만 낯설겠는가? 우리 삶은 때때로 어딘가 나만 홀로 남겨진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 용기가 헛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길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아내는 느낌. 아직 청춘인 그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것들을 찾고, 맛보고, 성취하면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인생에도 한 달 살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 방학만 되면 외가에 가서 한 달 살기를 했다. 언니들은 나와 놀아주기 싫으면 외숙모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앞에서 좀 절망하기도 했고 용기를 내서 문을 밀기도 했다. (외숙모가 좀 무서웠다) 아마도 그때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절망하고 되돌아설 것인가? 그래도 문을 밀어 용기를 내 볼 것인가? (되돌아서는 것이 꼭 나쁜 선택은 아니다. 분명 다른 세계는 또 있다. 둘 다 동량의 용기가 필요하다.) 하여튼, 방학마다 한 달 살기를 한 덕분에 나는 거기서 첫사랑을 만났고 그 녀석은 어린 내 감성의 팔 할을 키웠다.
폭풍이 지난 후의 고요함 혹은 블랙홀의 미동 없는 상태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 고요함이나 미동 없는 상태는 지극히 극적인 혼돈과 갈등과 낯섦 속에서 온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의식의 역설은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게 하기도 한다. 낯선 곳의 친밀함, 그것은 불안 후의 평화 같아 미지의 세계에서 잠이 들어도 말랑말랑한 햇살에 의지해 몸이 나른해지는 경험과 같다. 이 책이 그랬다. 나를 요동치게 했고, 나를 고문시켰고, 나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