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아니, 지금도 잘 쓰고 싶다. 그런데 수시로 못 써서 절망하고 안 써서 우울하고 때론, 즐겁다. 즐거운 건 쓰고 싶었던 글을 수박이 아닌 호박이라도 그리고 났을 때다. 아마도 이런 즐거움 때문에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거의 운명적이다.
배지영 작가는 나의 글쓰기 선생이다. 작가와의 인연은 그녀가 서점 상주작가가 되어 에세이반 수업을 개설했을 즈음이다. 나는 이것저것 쉽게 노크도 잘하는 사람인데 노크만 잘하지 끝까지 가길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나를 이끌어 한 가지 소재로 책 한 권이 되는 분량의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위대하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이렇게 이끈 사람이 십수 명은 된다.)
오만과 허영이 깊었던 나의 글을 농약 친 사과 깎듯 깎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와의 시간은 나에게 그런 깨달음을 줬다. 그런 그녀가 쓰기 마땅한 책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을 출간했다. 현장감 물씬 풍기는 그녀의 책을 읽다 보니 나는 다시 그 현장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그녀는 프롤로그에서 조지 오웰을 얘기했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 쓰는 동기 네 가지는 의미심장하다.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나의 글이 확장되지 못하는 이유는 순전한 이기심과 조금 선심을 쓰면 미학적 열정까지이다. 아직도 나의 소소한 글들은 순전한 이기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다. 그녀가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까지 나아가는 글을 쓰게 되는 과정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그녀의 주특기는 유머이다. 유머만 있지 않다. 그 안에 눈물 찔끔 나게 하는 감동도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고 나면 심장 깊숙한 곳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다. 눈물 나는데 또 웃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받고 했던 글쓰기 수업의 세계를 나와 그녀는 귀인이 되기로 했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대가 없이 시작한 일. 그녀는 우리들의 귀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자본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일을 가장 싫어했고 글로써 책을 만드는 일을 가장 좋아했다. 그녀가 부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그녀는 나와 키가 비슷해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음은 거인이다. 누군가의 글쓰기라는 꿈을 옆에서 같이 들어주고 밀어주고 격려하니 거인임이 분명하다.
말줄임표를 생략하게 하고 마침표를 찍게 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글을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쓰는 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몸으로 익혀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게 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현장에서 거침없이 쓰는 일을 알게 했다. 그녀는 뭔가를 자꾸 소환시켰다.
“사람들은 눈물을 쏟으면서 쓰고 고쳤다. 고통을 끝까지 파고들면,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지키는 힘이 생겼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현실은 바뀌지 않아도 글 쓰는 자기 자신을 달라졌다. 글쓰기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이유가 사라졌으므로 날마다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 말이 단박에 좋았다. 자신의 격을 지키고 고통을 끝까지 파고드는 일.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지키는 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보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신을 만나는 일. 그것이 그녀가 나에게 준 글쓰기 최전선의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