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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Oct 24. 2023

더 이상 만국기는 펄럭이지 않는다

[ 사진 일기 ] 라떼돋는 초등학교 대운동회

2023.10.13


초등학교 다니는 작은 녀석 대운동회 날. 코로나 때문에 전학년이 같은 날 참여하는 운동회는 입학하고 처음이다. 지 또래 엄마들보다 늙은 엄마가 창피할까봐 화장에 힘을 주고(그래봤자 립스틱을 한 겹 더 바르고 거울을 좀 더 오래 쳐다봤다는 이야기) 제일 깨끗한 옷을 골라 입고 나선다. 교문에 들어서니 알록달록 대형 에어바운스와 바람을 불어넣은 거대한 인형들로 눈이 어지럽다. 운동회 준비와 진행을 맡은 이벤트 업체에서 설치한 것이다. 엄마 아빠들은 학교에서 준비해놓은 천막 부스 밑에 집에서 가져온 캠핑용 릴랙스 체어에 조로록 앉아 있다. 아이들은 여러 풍선기구들을 체험하고 학년별 프로그램들을 소화하며 즐거워한다.  

언제부터인가 운동회가 이런 모습으로 변했는지 이 늙은 엄마는 다소 씁슬하고 어리둥절하다. 유년시절 운동회가 자동으로 소환된다. 학년마다 한달전부터 부채춤, 소고춤, 매스게임들을 검붉은 얼굴이 되어 땡볕에서 연습해야 했다. 운동회날이 되면 만국기가 하늘에 펄럭이고, 운동장 주변 빽빽히 자리한 돗자리위에 새벽부터 싼 김밥과 삶은 달걀 사이다 환타를 펼쳐놓고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 운동회는 시끌벅적 야단인 동네잔치였다.


그 시절 운동회는 대단한 에너지와 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왜들 그렇게 지나치게 열심히, 지나치게 무리했을까. 학교에서는 운동회날 선보일 춤등을 운동장을 가득 채우며 학년별로 하루에 1~2시간씩 연습하게 했다. 땡볕에 연습하다보면 픽 픽 쓰러지는 아이들이 시간마다 꼭 있었다. 남편이 해준 더 경악스런 이야기. 어느 해인가 남학생들은 곤봉체조를 선보여야 했고, 그 지도를 맡은 여자선생님이 잘 못 따라오는 아이를 지적하면 옆에서 보고 있던 남자선생님은 체벌을 전담하는 일을 했단다. 실수한 아이를 불러내어 때린다. 맞고 들어가서 연습하고 잘 못 하면 또 불러내서 때리고. 우리들 몸엔 그 폭력과 억압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새겨져 있다. 줄다리기나 고싸움, 학년 계주할때의 광기 가까운 응원 모습도 있다. 마치 콜로세움처럼 트랙을 둘러싸고 흥분한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큰 소리로 응원하고 급기야 어떤 아이들은 결과에 실망해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자 나이 측정 테스트 들어갑니다. 당신의 초등학교 운동회날 스피커에서는 BGM으로 어떤 음악이 흘러나왔나요? 나는 국민체조 시작~ 하는 그 특유의 하이톤 구령에 맞춰 삐걱대며 체조를 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젊은 엄마들은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들판을~'노래가 흘러나왔다고 얘기해줬다. 고3 큰녀석은 싸이의 '강남스타일', 지난 주 작은 녀석 운동회에선 홍대클럽처럼 계속 아이돌 댄스 음악이 고막을 때렸다. 스탠드 응원석에 앉아 있다가 아는 노래가 나오면 춤을 추는 녀석들도 많이 봤다. 요즘 아이들은 나비처럼 팔랑대고 표현에 부끄러움이 없고 자연스럽다.

나는 이 모든 광경을 마치 TV를 보듯 질서유지선이라는 테이프가 둘러진 바깥에서 관람한다. 아이들은 두리번 거리며 자신의 가족을 찾지 않는다. 아빠손 잡고 달리기, 할머니 모시고 달리기도 없다. 시간별로 분배된 프로그램을 질서정연하게 즐기고 수행한다. 부모들은 새벽부터 힘들게 김밥을 싸지 않아도 된다. 평소와 그다지 다를게 없는 점심 급식을 먹는다. 참관을 하는 부모들은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오면 안되, 자신의 아이나 반 아이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지 않기를 알림장앱을 통해 여러번 간곡하게 당부 받는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이제 올림픽 정신으로 페어플레이 하자며 달아놓았던 만국기가 없다. 거대한 캡틴 아메리카와 녹색 괴물 헐크가 운동장을 지키고 있다. 선생님들은 이벤트 업체에서 파견된 사회자와 아마도 체대를 다니다 꽤 좋은 일급으로 아르바이트 나온 것 같은 건장한 도우미들을 보조하며 엄마 거위처럼 아이들을 이리저리로 몰고 다녔다. 총천연색 에어바운스와 쾅쾅거리는 댄스음악이 눈과 귀를 자극하지만 '국민학교'에 다녔던 나는 요즘 운동회가 어째 좀 심심하다. 그 시절 운동회는 외부에서 하루짜리로 공급되는 게 아닌, 한 두달간 총력전처럼 빌드업된 행사였기 때문에 그 흥분과 설레임은 훨씬 격하고 크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냥 좋았다는게 아니라 그때는 그랬지~ 하는 말이다.


하지만 작은 녀석은 며칠 전 부터 이 운동회를 고대해왔고 운동회날은 깨우지도 않았는데 발딱 일어나 눈을 반짝이며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목청터지게 응원을 했는지 잠긴 목소리로 '엄마 오늘은 정말 끝내주게 행복한 날이었어'라고 한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운동회란 시대가 달라도 가슴이 뜨끈해지는 유년의 아랫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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