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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 산에 뜬 달 Mar 12. 2024

괴물이어도 괜찮아

고레에다 히로카즈 - <괴물>


금요일 늦은 오후. 아직 흥분과 열기가 덜 뭉쳐진 시간. 서울 시내에서 혼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관람했다. 영화는 화재 현장의 낼름거리는 불길, 소방차와 구급차의 사이렌으로 시작해 산사태와 폭풍우로 범람하는 거대한 물의 이미지로 끝을 맺었다. 돌아오는 길 당산철교 위에서 흐릿한 눈으로 검은 한강을 바라본다. 저 강은 영화속 마을 한가운데 존재하는 호수를 닮았다. 그 호수는 점멸하는 불빛의 야경속에서 주변의 불빛을 모두 빨아들인듯 크고 검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저 강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이 쓸려 내려와 가라앉아 있을까. 문득 이야기 하나가 강바닥에서 둥실 떠오른다. 


찢겨진 패딩

올해 대학 신입생이 된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날 롱패딩이 날카롭게 찢어져 돌아왔다. 찢어진 구멍으로 솜털이 다 빠져나와 점퍼는 마치 물에 젖은 것처럼 흐물흐물 납작했다. 차분함을 가장하고 물어보는 나에게 아이가 전한 이야기. 아들에게는 어울려 다니던 아이들이 있었는데 K와 A, B라고 하자. A, B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우리 아이와 알던 아이들이고 K는 학년이 바뀌며 어울리는 아이였다. 그 날 큰아이와 K는 사소한 일로 다투다 결국 몸싸움을 벌였고 갑자기 K가 가위를 꺼내 아들 녀석에게 휘둘러 옷이 찢어졌다는 것이다. 아이가 다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곧 K와 부모에게 맹렬히 화가 났다. 담임 선생을 통해 상황을 전해들은 K의 부모는 지극한 표현으로 사과를 했고 K도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전했다. K와 부모가 성실하게 대응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입지 못하게 된 롱패딩과 같은 제품을 구입해 받는 것으로 마무리 하기로 했다.

A, B는 그 싸움의 목격자중 하나였고, 찢어진 패딩을 수선할 동네 세탁소를 큰아이와 함께 찾으러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그 아이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들 녀석은 차차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큰 아이는 K와 학기초부터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했다. 자신과 비슷하게 소심하고 눈물 많은 녀석이라고 했다. A, B는 조용한 가해자였다. 아이와 K를 경쟁시켜 자신들의 울타리에 넣거나 빼는 방법으로 아이들을 길들였다. 패딩이 가위에 찢긴 날, 작은 분쟁의 씨앗을 던져 싸우게 만들고 가위를 꺼내들라고 부추긴 것도 그들이었다. 분노가 일었다. 아이들이 싸울때 동그랗게 둘러싸고 구경했다는 많은 아이들에게도 분노가 옮아갔다. 아이들은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A, B의 부모에게 전하고 설명을 요구했을 때 그들 중 하나는 자신의 아이가 그럴 리 없다 했다. 옷이 찢어진 내 아이를 위해 세탁소를 같이 돌아다니기까지 했는데 자신의 아이를 나쁜 아이로 호도한다며 억울해 했다. 또 다른 부모는 그동안 우리 아이가 당한 언어 폭력에 대해 사내 아이들은 그러면서 자라는 법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입었다면 아이를 주의시키겠다고 선심쓰듯 말했다.

서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그 일은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아이들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으며 그럭저럭 커갔다. 타인에게 휘둘려 몸과 의지를 빼앗긴 어두운 기억을 남기고. 


괴물들의 괴물찾기

고레에다 하로카즈의 영화 <괴물>은 등장인물의 시선을 달리해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초등학생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의 시선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녀는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이고 아들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친하다. 불륜녀와 온천으로 여행가다 사고로 죽은 남편이지만 아들에게는 좋은 아빠로 기억되게 하고 싶어 따뜻한 추억들을 들려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들이 학교에서 모종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음을 느낀 사오리는 미나토를 몰아붙인다. 겁을 먹은 미나토는 담임인 호리선생을 가해자로 지목한다. 그녀는 호리선생이 질 나쁜 호색한이라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녀에게 그는 용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린다.      


호리선생의 입장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사실 그는 온화한 성품에 약한 아이를 먼저 챙기는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사람이다. 하지만 호리 선생이 가진 진실과 선의는 셀로판지를 몇 장 겹친후 바라보는 세상처럼 다른 색으로 왜곡되거나 아예 검게 탈락된다. 그는 순식간에 괴물로 몰려버린다. 호리 선생의 눈에는 오히려 미나토가 괴물이다. 미나토는 약하고 착한 요리를 괴롭히고 교실에서 이유 없이 난동을 부리는 폭력적인 아이다. 그렇다면 미나토 안에는 어떤 괴물이 살고 있나. 그의 눈엔 누가 괴물인가. 미나토가 들려주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그제야 가려진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영화 속 누구나 상당하게 또는 조금씩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진짜 괴물은 누구일까 눈을 번득였고 방금 전 낙인찍은 괴물에서 새롭게 발견한 괴물로 갈아탔다. 괴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허공에 떠도는 깃털처럼 무해한 소문도 어느 순간 괴물의 형체를 갖춰 공격한다. 남들과 다르면 괴물인가. 그렇다면 누구나 괴물이다. 누구나 사려깊고 선량한 모습으로 살아가려 애쓰지만 동시에 쉽게 타인을 규정하고 낙인찍는다. 귀에 대고 외쳐도 진실을 외면한다. 자는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자는 척하는 사람을 깨울 수는 없다.

나에게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사람은 미나토와 요리가 다니는 학교 교장이었다. 그녀는 사건의 본 모습과 아이들을 둘러 싼 진실에 관심 없어 보이고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태도를 보인다. 그녀 자신에게 닥친 비극적인 불행까지 전시하고 이용하며 사건을 덮으려고 한다. 그녀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걸까. 누구에게나 있는 어둠, 공유하지 못하는 비밀의 세계를 무수히 보아왔기 때문일까. 마치 이 모든 소란과 혼란은 당연한 것이고, 인간은 누구나 그것을 겪고 견디고 자라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 


괴물이어도 괜찮아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일까. 거대한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 찬란한 햇살 아래 미나토와 요리 두 소년이 서 있는 장면은 너무 환해서 빛바랜 오래된 사진 같다.     


요리 : 우린 다시 태어난 걸까?

미나토: 그렇지는 않은것 같아.

요리: 아닌건가?

미나토 : 아니야 우리 모습 그대로잖아

요리 : 그런가? 다행이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 다시 태어나려면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아도 된다. 괴물이어도 괜찮아. 어차피 우리는 모두 다 조금씩 괴물이야.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도 된다. 괴물이 보기 싫다고 없애 버리지 말자. 불 태워 없애 버리지 말자. 물 속에는 온갖 모양의 생명체들이 생긴대로 공존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그 마을 한가운데에 그렇게 큰 호수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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