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복지라고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
제 오랜 친구인 Y는 남편과 함께 작은 게임회사를 운영합니다. 부부가 함께 일하고 있는 상황이나 직원의 규모가 비슷해 자주 고민을 나누곤 하지요. 친구는 저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로 여장부에 카리스마 있는 리더입니다. 남자 직원이 대부분인 데다 단체활동도 곧잘 참여해서 옆에서 지켜보면 꼭 단합이 잘 되는 체육 동아리 같습니다. 저희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요.
'가족 같은 회사'가 세상에 어딨냐고 하지만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회사사람들과의 여행, 워크숍, 회식 사진을 보면 여기는 정말 가족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행 좋아하는 엄마아빠가 열심히 세운 계획에 별 저항 없이 따라온 다 큰 이과생 아들들 같기도 하고... 다달이 국내로 또 해외로 떠나는 워크숍에, 철 따라 지역마다 다니는 제철음식 풍성한 회식에, 제주도 한달살이에 프로그램도 다채롭습니다. 가끔 외치곤 합니다. "야, 나도 너네 회사 다니고 싶다!!"
언젠가 연말에 명동에서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만났는데 친구가 색색의 양말을 쇼핑백 가득 사길래 물었습니다.
"뭐야, 웬 양말을 그렇게나 많이 사?"
"아, 우리 직원들 연말 선물 주려고."
"오, 연말 선물도 매년 챙겼었어?"
"응,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이렇게 소소한 것들이지만."
엄마가 쇼핑하러 와서 자기 옷은 안 사고 옷 잘 안 사는 (이과생) 아들들 옷만 잔뜩 사가는 그림이 떠올라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나도 사야겠다!" 그날 산 알록달록한 양말들은 그 해 우리 샘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지요.
그 후로 명절을 앞두고 친구를 만나면 꼭 물어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만났는데, 어김없이 물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추석 선물은 뭘로 했어??"
명절에 직원들 손에 커다란 박스를 들려서 집으로 보내는 것은 제 오랜 로망이었습니다. 명절 상여는 월급에 더해 통장으로 꽂히지만 그래도 명절이다 티 내는 건 역시 명절 선물세트가 아니던가요! 제 첫 회사생활은 나름 대기업이었고, 딱히 갖고 싶은 건 없었지만 명절 때마다 5만 원 이상 10만 원 이하의 선물을 고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의사가 되어 월급 받고 일할 때는 명절 선물을 챙겨주는 곳이 어디에도 없더라고요.
사실 추석 선물 따위는 직원 복지의 아주 일부일 뿐이라는 걸 저도 압니다. 제대로 된 복지는 그 회사를 계속 다닐만한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생각해 보면 나름 대기업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했는데도 사내 복지란 걸 별로 누려본 기억이 없습니다. 아마 있었는데 활용을 못한 걸지도 모릅니다. 기억나는 건 이런 것뿐입니다.
- 시즌마다 야구 표가 몇 장씩 내려왔음. (야구에 큰 관심이 없어서 다른 팀원에게 다 줘버렸지만)
- 매달 마지막 목요일에 지하 호프집에서 대규모 회식을 했음. (매번 도망갈 궁리뿐이었지만)
- 아, 계열사였던 주류 회사에서 판촉비가 나와 공짜로 회식을 했음. 대신 소주를 시키며 미션을 수행해야 했음. "이모, 여기 물처럼 깨끗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OO처럼' 한 병 주세요!!" (부끄러울 뿐이었지만)
휴가 제도가 어땠는지는 더 기억에 없습니다. 바쁘게 일할 때는 자리를 비울 수 없어 휴가를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마감 뒤에 다 함께 쓰는 며칠간의 대휴뿐이었지요. 회사에서는 주기적으로 연차를 소진하라고 독촉하는 메일이 왔습니다. 쓰지 않은 휴가가 매년 며칠 씩 남아돌았는데 연차 수당을 받았던 기억도 없어요.
주로 5인 이하 사업장인 다른 한의원들에 비해 연차도 챙겨 쓸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생일과 명절에 상여도 빠짐없이 챙기지만 그 이상의 복지에는 늘 아쉬움을 느낍니다. 작은 조직이라 한계는 분명하지만 또 작은 조직이기에 할 수 있는 일도 분명 있을 겁니다. 친구는 자기 스타일대로 회식, 여행, 워크숍을 동원해 직원들의 업무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있는데 나는 뭘 할 수 있지..?
그래서 때마다 이벤트처럼 작은 선물을 준비하곤 했어요. 젊은 여자 직원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말입니다. 이과생 아들들 말고 늦둥이 여동생들한테 예쁜 것 사다 주는 심정으로, 구경하다 좋아 보이는 게 있으면 우리 샘들 몇 명이더라, 하고 머릿속에 세어 보게 됩니다. 별거 아니지만 샘들 기분전환은 되겠지!
추석 선물도 늘 고민이 됩니다. 시작은 흔한 생활용품 세트였어요. 샴푸 몇 개, 린스 몇 개, 치약 몇 개로 구성된 'LG생활건강 5호 세트' 같은 것, 비싸지 않은데 명절 느낌은 제대로 나서 "엄마, 이거 회사에서 줬어"하고 퇴근길에 부모님께 안겨드릴 수 있는 것! 그러다 어느 해에는 큼직한 그림이 그려진 장우산을 사기도 했습니다. 스누피가 수놓아진 기념 수건 세트인 적도 있었고, 명인이 만든 국수세트를 준 적도 있습니다. 점점 부피가 작고 값이 좀 더 나가더라도 제가 갖고 싶거나 써봤는데 좋았던 걸로 준비하게 되었지요.
기껏 준비했는데 '다 됐고 그냥 돈이나 많이 주세요' 그런 마음들은 아닐까, 또 사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