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프닝, 카메라는 난민 심사관 물음에 답하는 로키타의 얼굴을 클로즈 업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소녀와 갑자기 만나게 된 관객은 소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심사관으로 영화에 동참한다. 법률 심사가 영화 속 심사관 몫이라면 보편적 인류애를 수평 기준으로 국경 밖에서 표류하는 로키타를 수직 위치에서 심판하는 것은 관객의 역할이다. 다르덴의 영화는 언제나 관람에서 참여로 영화의 역할을 확장시킨다.
-감독의 질문은 경청을 넘어 이웃의 연대와 제도의 마련까지 기대한다.
사회 다큐에 기반한 다르덴의 렌즈는 늘 울타리에서 소외된 미성년의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가정이 해체된 소년(자전거를 탄 소년), 위기의 소녀 가장(로제타)에서 테러 용의자가 된 이슬람 이민자 2세(소년 아메드)와 난민 신분의 토리와 니키타로 사회 구조의 골은 깊어지고 갈등은 확장되었다.
1. 로제타로부터 23년, 사회의 시스템은 언제나 가해자인가
식민지를 향한 제국주의의 원죄(로키타와 토리는 벨기에인처럼 불어를 쓴다)를 향한 무거운 질책에 비해 로제타를 유기한 모국 아프리카와 부모의 착취는 책임에서 쉽게 해방된다. 남이 버린 자식을 이웃들이 더 내 탓을 하는 지경이라면 비약일까.
2. 토리와 로키타 - 난민과 불체자라는 이방인
불량한 환경에 놓인 이민자 청소년 쉼터의 로키타의 지극한 모성과 별개로 토리는 범죄에 창의적이고 환경에 영리하다. 이들과 종교와 범죄로 연결된 주변 인물은 위태로운 남매를 숙주 삼아 기생하며 무자비하게 착취한다. 토리와 로키타도 체류증으로 피라미드의 최약자지만 무고한 피해자 위치에 놓기에는 생존이 목표인 이들의 범죄에는 주저와 고민이 없다. 감독은 <소년 아메드>에서 이슬람 세뇌에 자신을 구원하려는 교사를 살해하려는 소년의 신념에서 약자를 향한 일방적 연민에서 벗어나 먹이사슬의 학습과 순환으로 냉소적인 시각의 변화가 감지된다. 남매를 끊임없이 이용하고 협박하는 이웃은 아마도 성장한 로제타이거나 유럽에 정착한 아메드이기도 하다. 막힌 벽을 뚫고 가시를 헤치고 체류자격을 얻으려 인내한 로키타가 다짐하는 행복은 가사 도우미에 머물러 있다. 모국과 모성의 보호를 잃은 로키타는 스스로 토리의 누나가 되고 누군가의 어머니의 역할을 꿈꾸다 탈출하지만 자유를 얻자 희생당한다.
-마약공장의 감금, 착취와 탈출의 재현
죽음을 넘어 도착한 벨기에에서 로키타의 착취는 원격으로도 이루어진다. 대마공장에 다시 감급되어 탈출하는 묘사는 국경을 넘은 난민이 일시적으로 수용소에 갇혀있다 탈출하는 과정의 재현같아 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존을 위한 탈주와 어둠의 난민 산업과 감정없는 죽음이 뒤섞여 로키타의 공황은 답답한 폐소와 공포로 내게 전염된다.
엔딩의 토리는 오프닝 리키타의 감정 없는 얼굴과 연결되어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난민의 죽음이 일상인 현실을 증언한다.
-관객이 감독에게 던지는 질문
다르덴의 질문에 예전과 달리 정치적으로 올바를 답을 주저하게 되는 것은 체류 이후 집단이 된 그들의 삶에 의문이 커지기 때문이다. 다르덴의 일관된 오래된 질문이 난민이 이웃이 되어 직접적 충돌이 되는 내 가족에게 어떤 답을 줄 것인가. 영화가 화면 밖으로 나와 현실의 위기가 되고 있다. 난민을 약자로 고정하고 선량한 배려가 일방향의 강요라고 느껴지는 관객에게 감독은 이제 어떤 답을 들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