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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고 나서야 보이는 자리

by 달빛마차

임용 첫 해에는 유난히 병원 이야기가 많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해는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기도 바빴는데, 가족의 건강도 돌봐야 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처음은 아가씨였다.

부인과 쪽에 암이 발견되어 이미 수술을 했다고 했다. 이번에도 남편은 아가씨가 수술을 다 마치고 회복실에 있을 때 과거형으로 나에게 소식을 전했다. 아가씨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 회복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였다. 아가씨의 수술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남편의 변하지 않은 태도에 마음이 조금 상했었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 가라앉을 즈음, 또 다른 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남편이었다.

남편은 서울에서 생활하며 회사 동호회로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퇴근 후에 동호회 사람들과 운동을 했다. 워낙 약속이 많은 사람이라 평소에도 저녁 일정이 잦았고, 회식도 많은 편이었다. 그 전날에도 늦게까지 약속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도 평소처럼 “테니스 치러 간다”는 전화를 했다. 특별할 것 없는 통화였다. 그래서 그날 밤에 다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잠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수술을 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테니스를 치다가 발을 헛디디며 넘어졌고, 어깨로 바닥을 강하게 짚으면서 인대가 찢어져 다쳤다는 것이었다. 결국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고, 그 자리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남편이 웃으면서 해준 이야기가 하나 있다.

너무 아파서 구급대원에게 “앰뷸런스 사이렌 좀 켜고 빨리 가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 그럴 수 없다며, 신호를 다 지키며 천천히 병원까지 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 상황에서도 그런 장면이 떠오르니 어딘가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밤의 나는 웃을 여유가 없었다.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했고, 당장 서울로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수술 잘 받고 연락해”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밤이 지나갔다.

그 주말이 되어서야 병문안을 갈 수 있었다. 병실 문 앞에 서 있으니 마음이 묘했다. 걱정이 먼저였고,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 아주 현실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제 당분간 집에 못 내려오겠구나.


남편은 수술 이후 몇 주 동안 집에 오지 못했다. 아픈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해도 됐지만 이해와 별개로 생활은 계속 흘러갔다. 아이를 돌보고, 출근하고, 집안일을 하는 일상은 멈추지 않았다.

그 한 달은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우리는 주말부부였다. 자주 함께 있는 부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남편이 완전히 오지 못하게 되자,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같이 밥을 먹는 일, 아이를 잠깐 봐주는 일, 집안 공기가 조금 느슨해지는 순간들. 그동안 당연하게 지나갔던 것들이 사실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독박육아라는 말이 그때는 유난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지치는 날들이 많았다.

아이는 너무 사랑스러웠지만, 나는 학교일에 살림에 지쳐갔고, 차라리 합격전이 나았겠다 하며 합격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누군가의 존재는 늘 함께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자주 오지 않아도,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생각보다 큰 자리였다는 것.

그 사람이 없어진 몇 주 동안, 나는 그 자리가 생각보다 컸다는 걸 조용히 인정하게 되었다.

임용 첫해는 그렇게 지나갔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삶이 예고 없이 흔들릴 수 있다는 걸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자리였는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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