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고개 나들이

by 주드


아이들 등교하고 바로 나섰는데도
자꾸 정신이 한 곳으로 팔려서
지하철 역 지나치고 버스 놓치고
외국인 관광객처럼 헤매다가
간신히 이르렀습니다.
자하문 고개, 윤동주문학관.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
연극 무대에 단역으로 선 적이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문학청년 역이었고
연인에게 시를 하나 읊어주었습니다.
그때 내 손에 들린 시집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고,
내가 읊은 시는 <자화상>이었습니다.
그 작품에서 모든 배우가 춤을 추는 앙상블이 있었는데
장사익의 <자화상>이 배경음악으로 흘렀습니다.

그해 공연은
내게 큰 인상을 남겼고
윤동주는 정지용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자화상>은 나의 독백이며 고해의 시였습니다.

윤동주문학관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연대 안에 기념관 정도 있겠거니,
언젠가 가봐야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어요.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기에
나는 윤동주 문학관과 그 앞 풍경만 보고 오는 것으로
오늘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윤동주 문학관은 아주 작았습니다.
그렇지만 더 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만성비염환자인 나는 계속 훌쩍였는데
다행히 수요일 오전이라 관람객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시실 가운데에 오래된 나무 널빤지로 된 전시물이 있었는데
윤동주 시인 생가에서 발굴된 우물의 일부였습니다.
<자화상>의 시상이 이 우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고
이 오래된 흔적을 보려고 이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무척 감격했습니다.

좁고 고즈넉한 길 하나 두고 창의문(자하문)이 있고,
그 옆으로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이 시작되는 입구가 있습니다.
문학관 뒷동산에 ‘시인의 언덕’이 있고,
문학관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청운 문학도서관이 있습니다.

네, 위치 파악하고 후루룩 둘러만 보고 와야 했습니다.
오는 길에 좀 덜 헤맸으면
청운 문학도서관에서 30분은 더 앉아 있을 수 있었는데.
부암동 초입까지 조금 걸어 내려왔는데
“예쁜 카페와 와인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보이는 곳들을 눈앞에 두고
나는 지하철 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다음에, 가까운 날에,
꼭 다시 올 수 있겠지요.
그때는 스케치북이랑 펜과 연필을 가져와도
마음이 급하지 않기를.
그때는 노을도 볼 수 있기를.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좋아요.

오늘도 좋았어요.
햇살도, 하늘 빛깔도, 바람도.
내 발걸음도 무척 가벼웠어요.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