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 오르니 이번에도 마주 보고 앉는 좌석이었는데 아침에 탔던 것과는 다른 형태였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기차 칸 전체가 텅텅 비어 있어 배낭을 옆좌석에 기대여 놓고 자리에 앉았다. Mannheim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여유롭게 창밖 풍경이나 구경하면서 가야지 싶었다.
기차가 몇몇 역에 정차하고 움직이기를 얼마 반복하지 않았을 때 어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타더니 이번에도 내 앞에 앉았다. 아침에 만난 디미트리스와 달리 이 남자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내가 타고 있던 칸이 전부 빈 좌석들뿐이었는데도 그는 내 바로 앞에 앉았고 또 나를, 또 내 옆자리에 있던 가방을 훑는 그의 눈길이 심상치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약에 대해 알 길이 없는 나였지만 그의 눈은 마치 '마약 한 사람'처럼 확연히 풀려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이 많은 호스텔을 믿고 안심할 수가 없어 모든 현금까지 소지하고 있었는데 여행을 시작한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았으므로 그 액수도 만만치가 않았다. 재빨리 내가 타고 있던 기차 칸을 훑어보았으나 나와 그 남자 단 둘밖에 없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즉각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동안 티끌만큼도 두려움이 없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나는 자칫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를 요리저리 훑어보는 듯한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내게 말했다.
"너 내가 무서워?"
그 순간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지면서
'내게 왜 그걸 물어보는 거지? 무서워하는 거 티 안 내려고 했는데 티가 났을까?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 거지'
등등의 수십 가지 생각이 들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나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오래 끌거나 아예 대답을 회피한다면 내가 우려하는 일이 당장 일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불안으로 덜덜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애써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물었다.
"왜 내가 널 무서워한다고 생각해?"
"네 표정에 다 드러나 있어. 너는 지금 나를 굉장히 무서워하는 것 같아.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아, 이 사람은 내 심리를 파악하고 있구나.'
이렇게 된 거 장난식으로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네 말이 맞아. 나는 너가 지금 굉장히 무서워. 왜냐면 일단 나는 지금 누가 봐도 여행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여기 내 짐들을 다 가지고 있는데 여기엔 너랑 나 둘밖에 없어. 정말 만약에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가정했을 때 너는 내게 지금 당장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이렇게 솔직하게 내 심정을 얘기하고 나서의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예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래. 내가 보기에 너는 지금은 혼자고 네 말처럼 한눈에 관광객처럼 보여."
"나 사실 어제 한국에서 프랑크프루트로 도착했고 오늘이 이틀째야. 앞으로 거의 두 달을 더 여행 다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심지어 혼자 여행하는 거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정말 죽을지도 몰라. 이 여행을 위해서 진짜 오랫동안 열심히 돈 모아서 온 건데 일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너무 걱정돼."
"친구나 가족은 어딨어? 아예 혼자 여행 온 거야?"
"응, 가족들이랑 친구들 모두 한국에 있고 나 혼자 여행하려고 온 거야. 근데 벌써 너무 그립고 보고 싶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특히 우리 부모님이 정말 많이 걱정하실 거야. 물론 여기 오기 전부터 걱정 많이 하고 계시지만."
"너 진짜 겁도 없다. 나이가 몇인데?"
"한국 나이로는 21살인데 여기서는 19살이야."
"왜 나이가 달라?"
"한국은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1살인 데다가 생일이 기준이 아니고 새해를 기준으로 매해 첫날마다 동일하게 한 살씩 많아지는 것으로 해서 그래"
"그게 뭐야. 완전 이상한 시스템인데."
"한국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해보니 진짜 이상한 거 같네."
"아무튼 19살이면 아직 너무 어리잖아. 무섭지도 않아?"
"너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도 안 무서웠거든. 근데 너랑 있으니까 갑자기 무섭다."
"하하 이제 안 무서워해도 돼.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할 거거든."
"어? 원래 나한테 무슨 짓 하려 그랬어 너!?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근데 안 한다고 했으니 정말 안 할 거지? 뭐 얼마 되지도 않는 어린 여자애 전재산을 훔쳐간다던가?"
"걱정하지 마. 나는 안 그럴게. 근데 너 진짜 조심해야 돼. 표적 되기 딱 좋거든."
"그렇지 뭐, 동양인 여자애가 그것도 혼자 다니는데. 근데 앞으로는 진짜 어디서든 조심하긴 해야겠다. 나는 그래도 독일은 선진국이니까 치안이 엄청 좋을 줄 알았지."
"어떤 데는 그런데 그래도 어딜 가든 항상 조심해. 프랑크프루트에 있댔나? 거기도 범죄율 꽤 높은 곳 중 하나니까 특히 조심해야 돼."
"알겠어. 근데 너 첫인상이랑 다르게 좀 착한 것 같아. 첫인상은 진짜 무서웠단 말야."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착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래도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나 다음 역에서 내릴 거니까 내가 주의한 대로 항상 조심하고 잘 다녀. 근데 넌 어디로 가?"
"내 목적지는 일단 Mannheim이야. 사실 여기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어떤 사람이 좋다길래 가는 거야."
"맞아, 거기 꽤 예쁘고 정갈한 도시니까 마음에 들 거야."
기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자 일어선 그는 앉아있던 나를 엉거주춤하게 포옹하더니 안녕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정말로 그렇게 내렸다. 내가 무슨 정신과 배짱으로 저런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우려했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음에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처음에 내가 정말 그의 타깃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친 건지는 알 수가 없으나 어찌됐든 그는 내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 인물이긴 했으나 나름 유쾌하기도 했던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가 떠난 후 다시 텅 빈 기차는 내 다음 목적지인 Mannheim에 다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