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친해지고 나서야 더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던지 나는 어떤 계획이나 그곳에 대한 정보가 없는 채로 내가 직접 걸어 다니면서 여기저기 탐색하고 친해지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그렇게 내가 스스로 알아낸 것들로 채워 나가다 보면 머릿속에 나만의 지도가 훨씬 오래오래 선명하게 남곤 했다.
전날 밤에는 면접 때문에 브리즈번이라는 도시와 친해질 여유조차 없어서 첫인상이 인상 깊지는 않았는데 이대로 바로 떠나기는 아쉬웠다. 그래서 골드코스트에 계시는 돈 할아버지께 여기서 하루 있다가 내일 아침에 돌아가겠다고 연락드린 후 짐 찾으러 다시 돌아간 호스텔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모두 챙겨 9시에 다시 길을 나섰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지만 일단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내가 찾아가야 할 목적지가 확실한 게 아닌 이런 상황에는 보지 않고 정말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을 좋아한다. 걷던 길을 끝까지 따라가다 보니 보타닉가든이 나왔다. 10시쯤이 되면 철문이 굳게 닫히는 유럽의 많은 공원들과 달리 여기는 24시간 개방되는 점이 놀랍다. 군데군데 색깔이 변하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것도 참신했다. 이 정도로 완벽한 날씨에 이런 도심 속 숲이라면 한국 같으면 많은 인파들로 바글바글 할 텐데 여기는 너무 조용하고 한적해서 의아했다.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대체 브리즈번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런 궁금증은 꽤 빨리 풀렸다. 보타닉가든의 강변을 따라 쭉 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환하게 불 켜진 온갖 레스토랑과 펍이 모여있는 곳이 나왔다. 어젯밤 시티 중심가에서 보고 느꼈던 것과는 정확히 반대였다. 전반적으로 꽤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고 아시안이 아니라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보인다. 같은 도시 안에 걸어서 고작 2-30분 정도일 뿐인데 인상이나 느낌이 이렇게 크게 차이 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역시 단면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브리즈번에 대한 첫인상만 그대로 안고 떠났다면 고작 그게 전부 인 줄로 오해했겠지만 그 대신 몸은 좀 피곤해도 떠나기 전에 브리즈번과 조금이라도 더 친해지기로 결심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티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보증금 50달러에 24시간 일일 이용권은 2달러로 저렴하다. 단, 일일 이용권을 구매하더라도 한번 탄 자전거는 30분 이내로 다른 자전거 정류소에서 기계로 다시 반납했다가 빌려야 하고 그렇지 않았을 경우 시간이 초과한 만큼 금액이 보증금에서 차감되는 방식. 자전거 타는 것도 좋아해서 한국에서는 한강이나 서울숲에서 빌려서 많이 타고는 했는데 도심 내에서 탄 적은 거의 없었다. 브리즈번의 도심이라고 해봤자 서울의 규모나 크기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고 아담하지만 그래서 더 자전거를 타기엔 좋았다. 자전거를 탔다가 반납하고 걷기도 하다가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왁자지껄하던 Eagle Street Pier를 지나 브리즈번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듯한 스토리 브릿지가 있는 곳까지 걸어갈까도 싶었다가 그냥 어느 지점에서 돌아서 이번에는 강변이 아니라 빌딩들 사이로 걸어 다녔다. 평상시에 아빠를 닮아 방향감각이 꽤 좋다고 자부하는 나인데 이날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미 강 반대편 쪽에 걸어와 있는 줄 알았다. 걷다 보니 돌문이 보여서 따라 들어간 곳으로 가든이 다시 나왔는데 그곳이 내가 이미 걸어서 지나왔던 보타닉 가든일 거라고는 전혀 몰랐다가 아주 나중에서야 내가 잘못 알았다는 걸 깨닫고는 혼자 실소했다.
어쨌든, 모른 채로 두 번째 방문했던 보타닉가든에서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늦은 시간이라 그런 건지 정체 모를 동물과 새들이 출몰해 있었다. 그때는 뭔지도 전혀 몰랐다가 역시 나중에 알게 된 포썸과 컬루. 컬루는 다가가면 도망가는데 거기서 마주친 포썸은 내가 도망가도 먼저 다가왔다. 포썸 몇 마리가 잠깐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나서는 가만히 서서 구경하던 나한테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내 엄지발가락이 먹는 건 줄 알고 차례차례 살짝 깨물고는 사라지는 게 생김새만큼이나 귀엽다.
시간은 벌써 열두 시가 넘었다. 동물들을 한참 구경하다가 저쪽 하얀색 정자 안에 웬 남자 한 명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늦은 시간이고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냥 지나쳐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눈이 마주치고 그분이 나에게 인사를 건다. 이름은 마스이고 일부러 묻지는 않았지만 왠지 길에서 사는 부랑자인 듯했다. 잠깐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마스가 자기는 근처 세븐일레븐에 커피 사러 갈 참이었다 해서 따라가도 되는 건지 잠깐 고민했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서 세븐일레븐을 향해 같이 걷기 시작했다.
작은 컵 한잔에 1달러인 기계로 나오는 커피. 나는 플랫화이트, 마스는 라떼를 고르고 마스가 설탕을 3개나 넣는 걸 보고 나도 똑같이 3개 넣었다. 어차피 저렴하고 마스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할 듯해서 내가 같이 계산하려고 하니까 자기가 사주고 싶다며 내 것까지 계산해 버렸다.
커피를 들고 나왔는데 마스가 갑자기 편의점 앞에 있는 쓰레기통의 재떨이를 열더니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 담배 더미에서 재가 다 타지 않은 담배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담배를 골라 입에 문 마스는 그 길로 나에게 쿨하게 잘 가라고 인사하고는 혼자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버스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 도착했던 날, 우연히 길 가다가 친해진 어린 부랑자 아이들과 그날 밤 동틀 때까지 밤새 내내 같이 있게 된 적이 있다. 그때에도 아이들이 돈이 없을 텐데도 자기들이 먹을 케밥을 사면서 내가 먹을 것까지 사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진 것이 없을 때 나는 마스나 그 아이들처럼 이방인 같은 남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베풀 수 있는 사람인가. 예전 같으면 그런 선행이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나 역시 호주로 오기 전 백수인 상황에서 서울숲에서 만난 처음 보는 중학생 아이에게 치킨과 닭발을 사주고 헤어진적이 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비슷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