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온가족이 함께 처음으로 유럽으로 여행을 갔을 때, 그때 그 기억이 나의 뇌리에 이렇게나 오래 남아있
을 거라고는,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은연중에 바라는 꿈이 되고 실현이 되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적어도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만 가득했던 긴 겨울 내내, 그땐 그렇게나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만 같았던 대학입시가 끝날 때까지는.
그리고 20살. 마침내 아무 이유 없이도 젊음과 열정이 가득할 수 있는, 가득해야 할 것만 같은 그 나이가 되었을 때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유럽 배낭여행'이 불현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들처럼 보다 나은 나의 '미래'를 위한 학창시절 내내 공부와 대학입시라는 더 '크고 중요한' 목표를 위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내 가슴 저 깊은 속 안에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던 내 막연한 꿈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그 꿈은 내게 점점 뚜렷하게 다가왔기에 나는 학교생활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틈틈이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통장에 돈은 점점 쌓여가 여행이라는 내 꿈에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것은 좋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3월 초에 나는 2013년 7월 7일에 독일로 떠나 8월 31일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끊기는 했으나 정신없던 학교생활, 아르바이트, 여가생활 등 갖은 일들을 핑계로 일반적인 계획이나 일정 짜기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자로서 혼자 국내도 아닌 해외로 약 두 달간 여행을 다녀오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주신 부모님이었지만 떠나기 일주일 전까지도 그 어떤 경로도, 숙소도, 일정도 정하지 않은 딸을 보며 처음에는 걱정뿐이었던 말들에 이제는 화가 담겨 있을 정도였다. 답답하기로는 부모님과 마찬가지였음에도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떻게든 잘 다닐 것 같은 확신이 들어'라는 마음이 컸던 게 사실이다. 결국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늦은 시각의 도착 당일날과 그 다음날 묵을 이틀치 호스텔만 간신히 예약했고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2박 3일 부산여행을 다녀오느라 시간에 쫓겨 심지어 짐도 떠나기 이틀 전에야 싸기 시작했다. 남들은 여행 가기 직전이 제일 설레고 행복하다고들 하는데 지금도 기억하는 그때의 내 마음은 행복감을 느낄 겨를이 도무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찌됐든 결국 나는 정말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아무 제대로 된 준비가 없어 누가 봐도 무모해 보였겠지만 정말로 떠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 무모함이 즐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복잡 미묘한 마음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새벽 7시 쯤 엄마 아빠와 함께 집을 나섰다. 천으로 된 작고 낡은 캐리어 하나와 내 몸통의 절반이 조금 안 되는 크기의 튼튼한 배낭 하나를 아빠 차에 싣고 차가 출발하자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해 붉은 빛이 감도는 맑은 아침 하늘도 나를 기분 좋게 반겨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텅 빈 도로 위를 달리는 아빠 차 안에서 엄마 아빠의 우려와 나에 대한 불신이 가득 담긴 말들을 쉴 새 없이 듣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인천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항상 가족들과 여행을 갈 때 이 다리를 지날 때마다 나의 기분은 한껏 고양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가족 누구도 함께가 아닌 나 혼자라는 생각이 기분이 묘하고 이상하게 느껴졌고 그런 기분이 공항에 도착한 후로는 더욱더 커졌다. 마냥 행복하거나 즐거운 것도, 무섭거나 두렵거나 슬픈 것도 아닌 나조차 알 수 없는,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런 감정을 느꼈던 가장 큰 이유는 그토록 원해왔던 내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으나 그것은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여행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 되어 엄마 아빠와 작별을 해야 했을 때 진한 포옹 후 부모님을 마주 보는 내 눈가에도 부모님의 눈가에도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의 큼직한 눈물방울은 맺히지 않았다. 행여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일부러 더 밝게 큰소리로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고 들어갔는데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과 동시에 눈물이 내 뺨을 가르며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저 문 뒤로 부모님도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으실 것만 같아 순간적으로 다시 게이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의 여행은 비로소 정말 시작되었다. 고작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가족들이, 친구들이 많이 그립겠지만 동시에 나는 무엇보다 더욱 환한 미소로 당당하게 다시 돌아와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 누구를 만날지, 어디에 언제 갈지에 대한 답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내가 앞으로 여행 중 겪을 수많은 미지의 경험들에 대한 두근거림을 안은채 나는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