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고 황당한 제안

In Amsterdam

by 김민지

그 세명은 백인 두 명과 중국인처럼 생겼지만 네덜란드어를 하던 한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내게 먼저 네덜란드어로 말을 하길래 내가 영어로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모른다고 하니 다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아까 걔네가 너한테 괜히 와서 찍접대고 그러는 거 같아서 우리가 얼른 꺼지라고 그랬어! 여자 혼자 있는데

위험할 수도 있다고 그런 자식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살짝 당황스움과 동시에 속으로 '응...? 너희라고 안 위험한 게 맞을까...?

걔네가 위험한 애들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그냥 몇 마디 건넨 것뿐이었는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 친구들의 오해였든 아니었든 어쨌든 자기들이 봤을 때 내가 위험해 보여서 도와주려 한 건 사실인 것 같았다.

"아, 그렇게 보였구나. 그냥 너네 오기 전에 잠깐 말 걸길래 주고받은 거였는데 어쨌든 고마워."

"걔네가 어떤 애들 인지도 모르는데 진짜 위험할 수도 있다고. 그렇다고 우리들을 오해하지는 마! 우리는 진짜 그런 나쁜 애들도 아니고 너한테 무슨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자기들도 내게는 정체모를 낯선 남자들인데 자기 입으로 위험하지 않으니 안심하라는 투의 말이 웃겼다.


"근데 너 왜 여기 혼자 이러고 있어? 지금 이 새벽에? 친구들은 어딨어?"

아까 먼저 말 걸어왔던 남자들의 질문과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대답하니

"그럼 지금 혼자 여행 중이라고?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어? 네가 아시아인인 건 말 안 해줘도 알겠어."

"한국에서. 너도 아시아 쪽에서 여기로 이민 온 거야?"라고 내가 생김새가 중국인같이 보였던 Erwin을 가리키며 물었더니 나머지 두 명인 Dion과 Lloyd가 갑자기 막 웃더니

"너도 쟤가 중국인인 줄 알았지? 그렇게 생기긴 했는데 중국인은 아니고 혼혈이야."

"아 정말!? 오해해서 미안해! 같은 아시아인인 줄 알고 왠지 반가운 마음에 물어봤는데 내가 실수했어."

"아냐, 괜찮아. 그런 말 되게 많이 들어봐서 어릴 땐 싫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해. 아빠는 네덜란드인인데 엄마가 필리핀에서 오셨거든. 태어나고 자란 건 네덜란드라서 아시아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게 거의 없어. 그리고 이렇게 진짜 아시아인이랑, 그것도 한국인이랑 대화해보는 건 거의 처음인 거 같아. 근데 네가 만약 우리 집에 놀러 온다면 특히 우리 엄마가 진짜 반가워하고 좋아하실 거 같은데 안 놀러 가 볼래?"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독일에서도, 벨기에에서도 그러더니 이곳 네덜란드에서조차 정체 모를 나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초대하는 것에 대해 순간

'내가 혼자인 데다가 여자라서 다가오기 쉬워 보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단순히 외국인에 대한 호의나 호기심에서 비롯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 유럽 사람들은 이렇게 낯선 사람도 집으로 쉽게 초대하는 문화인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뭐라고? 너네 집에 놀러 오라고? 지금 솔직히 좀 놀라워서 그런데 나도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너도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놀러 오라고 할 수 있는 거야?"라고 정말 궁금한 마음으로 물었더니

"물론 서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얘기를 하다 보면 조금씩 알게 될 거고, 내가 형이랑 남동생도 있는데 집에 남자만 넷이다 보니까 엄마가 너를 보면 진짜 반가워하실 것 같기도 하고 또 특히 네가 같은 아시아인이니까 더 그럴 거 같아서 해본 얘기인데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마."

다른 친구들도 웃으면서 "우리도 얘랑 같은 동네 살면서 오래 본 친구들인데 얘 가족들이랑 같이 살고 있는 거 맞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얘가 사이코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우리가 확실히 보장해줄게."라고 거들었다.


그날 밤 펍에서 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맥주를 9잔이나 얻어마신 탓에 물론 정신은 아직 멀쩡했지만

이 모든 상황과 갑작스럽고도 황당한 제안이 더욱 재밌게 느껴졌다.

지금 와서 그때를 돌이켜봐도 내가 참 판단력이 흐려지긴 했었구나라고 새삼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때 그 제안을 승낙한 게 그렇게 두고두고 잘한 일이었을 줄은 그때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라이체플라인에 있는 클럽과 펍들이 문을 닫는 시간이라 안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였어서 이 친구들도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겠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나보고 꼭 가봐야 할 데가 있단다.

"여기 근처에 진짜 크고 좋은 공원이 있거든 Vondelpark라는 곳인데 가본 적 있어?"

"어떤 가게 점원이 거기 추천해주셔서 오늘 진짜 가보고 싶었거든! 근데 찾다가 결국 어두워져서 못 가봤는데."

"아 진짜? 그럼 더 잘됐다. 우리끼리 밤에 암스테르담 놀러 나올 때마다 거기 가서 맥주 마시는데 그 공원 진짜 좋아."

그러더니 정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깜깜한 야밤에 낯선 남자 셋과 공원을 가다니 뒤늦게 생각해보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건데 그때는 덩달아 흥에 취해 정말 그런 생각조차 들지가 않았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간이 가판대에서 하이네켄 맥주를 여러 캔 사더니 공원을 가는 길에 각자 한 캔씩을 먼저 땄다.

낮에 그렇게 찾아 헤매도 도통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던 공원이 위치한 곳은 허무하게도 라이체플라인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곳이었다.

한밤중이라 우리들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오고 가는 사람들도 몇 명 있고 우리처럼 벤치나 잔디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몇 명 보였다.

내 또래라고 짐작만 했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면서 장난치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약간은 철이 덜 든 것 같아 몇 살인지 물었더니 디온은 나랑 동갑인 21살이고 에르윈은 23살이고 로이드는 22살이란다.

내가 놀라면서, 한국에서는 나이가 꽤 중요하게 작용해서 보통은 동갑끼리 친구인 경우가 많다했더니

여기서는 나이가 별로 대수롭지 않고 그냥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나와 정말 친한 친구들 중에도 빠른 년생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갑이 아닌 친구들이 없는 것 같은데,

내심 그런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부러운 한편으로 빠른 년생에 대한 얘기까지 하면 이 친구들이 놀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각자 두 캔씩 맥주를 마시고 다시 광장 쪽으로 걸어가는 중에 에르윈이 말했다.

"로이드는 스쿠터가 있는데 우리가 타기엔 어차피 좀 비좁으니까 네가 같이 타고 오는 게 좋을 거 같고 나랑 디온은 택시 타고 먼저 가있을게. 어차피 우리 셋 다 같은 동네 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로이드가 너를 우리 집으로 데려다 줄 거고 도착할 때쯤 로이드가 나한테 연락하면 문 열어줄게. 곧 다시 봐."


맥주의 취기가 공원에서부터 점점 더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에르윈과 디온이 먼저 택시를 타고 남은 우리 눈앞에서 떠나는 것을 본 후

자기 헬맷을 내 머리에 씌워주고 내가 뒤에 잘 타고 있는지 확인한 로이드도 시동을 걸었다.

새벽녘이라 아침 공기가 안 그래도 차가운데 달리는 스쿠터에 앉아 찬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니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해가 뜨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지긴 했는데도

취기가 점점 더 오르는 터라 에르윈네 집까지의 길가의 풍경들은 중간중간 어렴풋하게만 기억됐다.

한참 20여분을 달리고 드디어 로이드의 스쿠터가 한적한 주택가 안의 어떤 집 앞에 멈춰 섰다.

로이드가 에르윈에게 전화를 건지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에르윈이 반겨주었다.

로이드에게 데려다 주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인사를 전한 뒤 에르윈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 앞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순간 내 발자국 소리가 크게 나자 에르윈이 "가족들이 모두 자고 있으니까 쉿"이라며 주의를 줬다.

아직 새벽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남의 가정집에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상식 밖의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때는 갑자기 피곤이 확 몰려오고 거기에 취기까지 더해져 몸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으므로 그런 생각조차 들지가 않았다.

계단은 3층까지 이어져있었는데 2층에는 방이 3개 보였지만 3층에는 방이 하나였다.

"여기서 일단 자면 되고 네 집처럼 편하게 푹 잤으면 좋겠어. 잘 자고 이따 봐."라며 에르윈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방을 둘러볼 틈도 없이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다.

또다시 새로운 낯선 집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곧장 잠이 들고 말았다.

잠이 깨고 난 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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