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Ouderkerk
갑자기 눈이 떠지며 정신이 돌아왔다.
'여기가 어디..... 세상에.... 미쳤어. 진짜 미쳤어.'
지난밤이 떠오르면서 내가 이 집에 오게 된 과정도 차츰 기억이 났고 이제 큰일 났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아무리 에르윈이 먼저 초대했다고는 하지만 덜컥 응한 내가 문제였으므로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일단 이 집이 있는 곳이 대체 어디인지, 암스테르담에서 얼마나 떨어진지도 정확히 모른다는 것과
이 집엔 분명히 에르윈네 가족들이 같이 사는데 그 가족들이 나를 본다면 어떤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것.
사실 두 번째 문제 때문에 이 집에 온 후로 처음으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5시에 잠이 들었는데 시간을 보니 9시 반밖에 안 돼있었다.
'그래, 아직 가족들이 자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집을 나가면 모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에
짐을 챙겨서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졸이며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2층에 도달하기도 전에 어떤 여자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에르윈이 말했던,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근본적인 이유였던 그의 엄마였다.
순간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경직된 내가 당황해서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에르윈 친구 맞지? 나는 에르윈 엄마인데 만나서 반가워. 배고프지? 2층에 욕실 있으니까 씻으려면 씻고 1층으로 내려와서 아침 먹으렴."
집안 식구들 몰래 집을 탈출하려던 내 계획은 시도도 해보기 전에 무너졌지만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나를 대해 주시는 아주머니의 태도였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봤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자식이 낯선 이성을, 그것도 그 나라 사람이 아닌 사람을 간밤에 집으로 데려온 것을 알았을 때의 부모님의 반응은 절대로 아주머니와 같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첫인사부터 내게 그렇게나 친절하게 해주신 아주머니의 반응이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의아했지만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셔서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조금은 풀리고 안심이 되었다.
에르윈도 밤을 새워서 피곤할 테니 아직도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도 놀라웠다.
일단은 씻고 내려오라는 아주머니의 말씀대로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는데 계단 옆 방인 그곳은 부엌과 거실이 있는 곳이었다.
조심스럽게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계셔 있던 에르윈네 아버지를 보고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아주머니와 달리 내게 화를 내시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이 드는 찰나
아저씨 역시 아주머니와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태연하게 내게 "헬로~"라며 인사를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나도 애써 침착한 척을 하며 "헬로"라고 응대하고는 내 이름을 물으시는 질문에 '민지 킴'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민치? 민치이? 하시더니 어렵다고 하셔서 그냥 킴이라고 부르셔도 된다고 하니 그 후부터 나는 이 집안 식구들에게 계속 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나중에는 내 본명을 킴이라고 착각하실 정도였다.)
곧이어 아주머니께서 내게
"여기 와서 식탁에 앉아봐. 아침 식사 뭐 먹고 싶니?"라고 물으셔서 아무거나 상관없다 했더니
"여기 빵도 있고, 잼들도 이런 이런 거 있고 냉장고에 치즈랑 햄이랑 우유랑 주스 다 있으니까 마음 편하게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고 친절히 설명까지 해주셨다.
에르윈이 왜 이렇게 친절했던 건지 그의 부모님을 뵈니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남은 채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와 아저씨 두 분 다 외국에서 온 이방인인 나에 대해 무척 궁금한 것이 많으셨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에르윈이 얘기했니? 나는 원래 네덜란드 사람은 아니고 필리핀에서 와서 결혼하고 나서 귀화했어. 너는 한국에서 와서 혼자 여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럴 용기가 있는지 참 대단하구나."
"네, 아주머니께서 원래 필리핀에서 오셨다고 얘기 들었었어요. 한국에서는 대학생인데 예전부터 항상 유럽 배낭여행을 해보는 게 꿈이었어서 이번 방학 동안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다니게 됐어요. 딱히 용기가 있다기보다는 원래 제가 겁이 좀 없어서요."
"그렇구나. 여행 시작한지는 오래되었니?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바로 온 거야?"
"아뇨, 이제 오늘로 9일밖에 안돼요. 독일에 도착해서 벨기에에 있다가 어제 암스테르담 도착했어요."
"어제? 그럼 아직 제대로 둘러보지는 못했겠구나! 네덜란드에서는 얼마나 있으려고?"
"제가 원래 계획 없이 다녀서 그냥 제 마음대로라서 아직 생각을 안 해봤어요."
"그럼 일정이 급하고 그런 게 아니면 우리 집에서 편할 대로 머물다 가도 돼~"
"네? 정말요? 아니에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저도 너무 생각 없이 갑작스레 찾아와서 죄송하기도 하고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요."
"아니야 실례라니. 우린 정말 상관없고 또 나도 네 또래 아들만 셋이라 항상 딸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와줘서 오히려 고마운걸. 네가 불편하지 않으면 좀 더 편하게 머물다 가면 좋을 것 같아. 가족들도 많이 그리울 텐데 나를 그냥 엄마처럼 생각해도 돼"
이런 말씀을 듣다니 이번에도 정말 운이 과분하게 좋은 게 분명했다.
초면인데도 나를 이렇게까지 편하게 대해주실뿐만 아니라 이 먼 땅에서 친부모님이 아닌데도 딸처럼 예쁘다고까지 해주시는 분들을 만나 뵙게 되다니 감동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사 전 아저씨께서 나를 위해 손수 커피를 끓여주시기까지 했는데 그런 하나하나조차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 아주머니와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계단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 에르윈인 줄 알고 고개를 돌렸는데 좀 더 앳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에르윈의 남동생이었다.
"안녕, 이름이 민지 맞지? 형한테 얘기 들었어.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하고 만나서 반가워."
"응 안녕, 나도 만나서 반가워. 네 이름은 뭐고 형보다 몇 살 어린 거야?"
"내 이름은 Kees.jr야. 우리 아빠 성함이 Cees인데 아빠 이름 따서 그렇게 부르고 나이는 20살이야."
"그럼 너도 올해 대학생이야? 이 나라 교육시스템을 내가 잘 몰라서."
"우리나라가 교육제도가 좀 특이하긴 한데 나는 HVO과정이라 이제 2학년이 돼."
나라별로 조금씩 교육제도가 다른 건 맞지만 HVO는 뭐고 어떻게 다른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려는데 그때 에르윈이 내려왔다.
에르윈 덕분에 이 집에 놀러 오긴 했지만 혹시 그가 나를 초대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약간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그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보자마자 "안녕"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나보다 일찍 일어났을 줄 몰랐는데 잘 잤어?"
"응,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속이 약간 안 좋은 거 말고는 괜찮아. 뭐 좀 할 일이 있는데 이따가 일 나가야 되거든."
'나를 데려온 에르윈이 일을 하러 가는 사이에 나는 여기서 혼자 뭘 해야 하지...? 아무래도 그냥 떠나는 게 맞는 게 아닐까..."
"일? 무슨 일 하는 거야?"
"친구네 부모님이 볼링장이랑 바를 같이 운영하시는데 거기서 친구랑 같이 일하거든. 오늘 바로 가봐야 되는 거야? 아니면 우리 엄마 아빠가 너 데리고 주변에 구경시켜주고 싶다고 하시던데."
"정말!? 그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너무 감사하다. 너네 부모님이랑 동생 모두 다들 좋으신 거 같아."
"그렇다니 다행이다. 우리 부모님도 너를 되게 좋아하시는 거 같아. 내 말이 맞지?"
키스 주니어는 친구랑 놀러 나간다고 하는데 자기 친구인 Jelle를 내게 인사시켜준다며 집 앞으로 따라 나갔더니 키가 190쯤은 돼 보이는 장신이 서 있어서 놀랐다.(2년 후 이 친구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아주머니 아저씨께서 나보고 같이 근처 호숫가에 수영을 하러 가자고 하셨는데 나보고 수영복이 있냐고 물으시길래 기차역 락커에 넣어둔 캐리어에 있다고 하니 흔쾌히 아주머니 수영복을 빌려주셨다.
아저씨 차를 타고 가는 길에도 풍차나 운하같이 예쁜 풍경을 지날 때마다 차를 세우고는 아주머니 디카로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시고는 했다.
호숫가에서 수영을 한다길래 처음에 의아했는데 도착하고 나서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평일 낮인데도 열댓 명의 사람들이 잔디 위 돗자리에 누워 일광욕을 하거나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은 호수에서 유유히 수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인 데다가 너무나도 한적해 보여서 좋았다.
한여름의 낮이라 태양빛이 꽤나 뜨거웠는데도 불구하고 호숫물이 꽤나 차갑고 수심이 얼마 안가서부터 금방 깊어져서 두려운 마음에 나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만 호숫가 근처에서 헤엄치다 나왔는데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이전에도 종종 이곳에서 수영을 하셨어서 그런지 바닥 아래 수심이 족히 10m는 될 것 같은 저 멀리 깊은 곳까지 헤엄쳐 가고 계셨다.
잠깐 동안 물장구 좀 쳤다고 헥헥거리며 가쁘게 숨을 쉬는 나와 다르게 아주머니 아저씨, 심지어 더 연세가 많아보시이는 분들도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수영을 잘 하시는 걸 보니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건강함을 유지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가 먼저 물 밖을 나온 후에도 한참을 더 있다 나오신 아주머니 아저씨가 건네주신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으면서 따스한 햇볕 아래 대자로 누워 몸을 말리고서는 다시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집 주변의 풍경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시며 아저씨가 태어나고 자라 왔다는 집과 동네도 보여주시고 예쁜 풍경이 있는 곳에서는 차를 세워 한 장 한 장 사진까지 찍어주신 덕분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오후 네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그런데 집 앞에 차를 대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아까 나갈 때는 안보이던 자전거를 보더니 아주머니께서 내게 Laurense가 말도 없이 갑자기 집에 온 것 같다고 하시며 반가워하셨다.
아침에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첫째 아들 26살 라우렌스도 있는데 형은 몇 년 전부터 암스테르담에서 자취를 해서 집에는 1~2주에 한 번쯤 주로 주말에 불쑥 나타난다고 했기 때문에 그를 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때마침 오늘 가족 누구에게도 말없이 집에 왔다고 했다.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갑자기 난생처음 보는 웬 동양 여자애가 있어서 그도 나를 처음 봤을 땐 나만큼이나 적잖이 놀란 듯했는데 아주머니의 설명을 듣고는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주머니는 분주히 저녁식사 준비를 하셨는데 에르윈이 일 때문에 없다고 하더라도 홀로 5인분을 준비하셔야 하니 바쁘실 만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주방에서는 거의 있어본 적이 없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라 무안한 내 마음을 아셨는지 아주머니께서 이따 식사 때 부를 테니 위층에서 라우렌스랑 얘기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그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노크를 하고 나라고 했더니 흔쾌히 들어오라 해서 보니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켜고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던 중이었던 것 같아 무엇을 하던 중인지 물으니
"학교에서 사회. 행정제도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데 지금은 학교 인턴제도 때문에 사회연금공단과 관련된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있어. 처리해야 할 서류업무들이 있어서 하는 중이야."
"학교 인턴제도? 그게 뭐야?"
"대학 과정 중에 몇 개월 동안은 필수적으로 내가 공부하는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해야 되거든."
"아, 그렇구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재밌어?"
"응, 처음에 시작할 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점점 더 나한테 잘 맞는 거 같고 즐거워."
"적성에 잘 맞고 흥미 있다니 다행이겠다. 키스 주니어가 HVO라던데 너도 같은 과정이야?"
"아니 나는 대학과정이라 좀 달라."
"HVO는 뭐고 대학은 뭐야? 같은 대학교육과정 아니야? 둘이 어떻게 다른 거야?"라고 내가 물었을 때 라우렌스가 친절하게도 네덜란드의 교육과정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는데도 우리나라 체계와 다른 점도 많은데다가 내겐 너무 복잡해서 사실 제대로 생각조차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간단히 몇 마디만 주고받으려다가 궁금한 게 많아져서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 아주머니께서 저녁 먹으러 내려오라고 외치시는 소리가 들려 라우렌스와 함께 내려갔더니 그 사이 키스 주니어도 밖에서 친구와 놀다 집에 돌아와 있었다.
라우렌스랑 키스 주니어도 서로 며칠 만에 봐서 그런지 얼굴을 보자마자 굉장히 반가움이 넘쳐 친근하게 인사하고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가 좋아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갑자기 하나뿐인 남동생이 그리워졌다. 고3이라 요즘따라 많이 힘들 텐데...
당연히 부엌에 있는 식탁에서 다 같이 식사를 할 줄 알았더니 오늘 날씨도 좋으니 집 뒷마당에서 식사를 하자고 하신다. 주택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집 마당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는 것조차 새롭게 느껴졌다.
아주머니께서 정성껏 준비해주신 요리들을 1인당 한 접시에 담아 야외에 있는 테이블로 나르고 나서 아저씨, 아주머니, 첫째 라우렌스, 셋째 키스 주니어와 다 같이 식탁에 앉으니 이 집 가족도 아니고 오늘 처음 놀러 온 손님(?)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잠시나마 이 가족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 참 묘했다.
저녁 메뉴는 홈메이드 생선 튀김, 감자튀김, 미트볼, 샐러드, 아보카도와 더불어 함께 곁들여마시는 와인이었는데 식사 중 내내 이 요리가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훨씬 정성 가득하고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마시겠냐는 아저씨의 질문에 당연히 예스!라고 답한 나와 달리, 아주머니는 원래 술을 안 좋아하셔서, 첫라우렌스는 헬스를 하면서 몸 관리 때문에, 셋째는 특이하게 친구들이랑은 술을 잘 마시는데 집에서는 안 마신다 그래서 결국 나와 아저씨 둘만 와인잔을 비웠지만 식사 내내 분위기는 너무나도 화목하고 즐거웠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여름이라 낮이 길어 아직도 해가 지려면 시간이 남았는데 아주머니께서 내게 근처를 함께 구경시켜줄 테니 나가자고 하셨다.
집을 나가기 전에 에르윈은 다른 날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라우렌스는 아주머니와 내가 외출하는 사이 다시 암스테르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며 내게 먼저 작별인사를 건넸다.
짧은 만남이었고, 그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운 마음은 있어도 그래도 이렇게 생각지 못하게 만나보기라도 한 게 다행이다 싶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시는 듯한 아주머니께서 이렇게 세 아들이 한자리에 있을 때 기념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우리 넷을 나란히 세워 사진을 여러 장 찍어주시는데 나뿐만이 아니라 세 아들들도 그 상황이 재밌었는지 사진을 찍고 나서도 웃음이 터졌다. (어릴때부터 아들들 사진을 너무 많이 찍어줘서 그런지 아들들이 이제는 사진찍는 것을 싫어한다고 나한테 계속 투덜대셨다.)
아까 낮에처럼 차를 타고 구경시켜주는 건가 싶었는데 아저씨가 집 앞 창고에서 미리 꺼내놓으신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집 앞에 서있었다. 하나는 아주머니를 위해, 다른 하나는 나를 위해.
네덜란드가 자전거로 유명한 나라인 것을 너무 잘 알고 사실 초등학교 때쯤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네덜란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을 때도 어딜 가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인상 깊게 남았었는데 내가 이렇게 직접 네덜란드에서 자전거를 타게 되다니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임에도 꿈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해보고 싶다고 꿈처럼 생각했던 것들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현실로 이뤄지는 것이 아직까지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집에 있던 자전거들은 고장이 나거나 녹이 슨 지 오래여서 자전거를 타는 건 기껏해야 친구들과 종종 한강 공원에 놀러 갈 때 대여한 자전거를 탈 때뿐이었는데 한국도 아닌 네덜란드에서 시원한 저녁 바람을 가르며 엄마같이 느껴지는 아주머니와 함께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내 발에는 경쾌함이 가득했다.
20분쯤 힘차게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전철역, 기차역, 영화관, 복합 상가 등이 몰려있는 Bijlmer라는 곳이었는데 그다지 구경할 것은 없어도 그냥 집 주변의 중심가를 보여주고 싶으셨나 보다 했는데 아주머니께서
"암스테르담에서 전철이나 기차를 타고 여기로 도착해서 저기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000번을 타고 어디서 내리면 돼. 거기서 집까지는 안쪽으로 15분쯤 걸어들어와야되지만 여기 도착해서 우리한테 전화하면 네가 내리는 곳까지 금방 데리러 나갈 테니까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언제든지 우리 집에 다시 놀러와."
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생면부지의 나를 이렇게 딸처럼 예뻐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격에 겨운데 나중에 언제든 다시 오라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나한테 하나하나 길을 알려주시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저무는 해가 뿌리는 붉은빛이 자전거 도로 옆에 펼쳐진 수풀 너머로 흐트러져 더욱 좋았다. 한발 한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그 순간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도착해 자전거를 창고에 넣어 두고 나서 아주머니는 좋은 생각이 있다며 나보고 같이 이웃집 아주머니 댁에 놀러 가자고 하셨다. (이 아주머니도 2년 후 다시 만나 뵙게 될 줄이야!)
이웃집은 정말 말 그대로 서너 집 떨어진 곳이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 성함은 에스더였고 이 아주머니도 원래는 이란에서 왔다가 네덜란드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쭉 사신다고 했다.
제시카 아주머니가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에스더 아주머니께 내가 어떻게 당신 댁에 놀러 오게 됐는지, 내가 어디서 왔고 지금은 여행 중이라는 것 등등에 대해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섞어 설명해주셨고, 에스더 아주머니께서 끓여주신 커피를 마시며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재밌게 엿듣고 있는데(두 분이 서로 네덜란드어로 대화하는 게 편하실 텐데도 나를 의식하셔서인지 굳이 영어로 말씀을 하셨다) 갑자기 에스더 아주머니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짧게 통화를 마친 아주머니께서 제시카 아주머니께
"우리 딸인데 얘가 지금 남자친구 만나러 갔거든. 오늘 남자친구네서 자고 온다고 연락 왔네."
응...? 아까 아주머니 따님이 나보다 한 살 어리다고 들었는데 오히려 당황한 나와 달리 아주머니들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씀하셔서 놀라 계속 얘기를 들어보니
"그래? 그럼 피임은 제대로 하라고 해야지~"
"그럼, 당연히 여러 번 얘기했지. 그리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인 내게 가장 먼저 말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렇게도 당부했고."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두 아주머니의 대화가 내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만약 우리나라라면,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이웃집 아주머니들끼리 자녀의 피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두 아주머니들의 대화 내용에 나는 공감이 많이 되었고 이때 내가 느꼈던 생각들은 그 후에도 내게 영향을 미쳤다.
한 시간 가량 이어진 아주머니들의 흥겨운 수다가 끝나고 제시카 아주머니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느덧 밤이 꽤 깊은 시각이라 아저씨도, 에르윈도, 키스 주니어도 각자 제 방에 있는 듯했다.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푹 자라는 아주머니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나는 3층 방으로 올라왔다.(라우렌스랑 낮에 얘기하던 중에서야 원래 그 방이 그의 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니 지난밤을 꼴딱 새우고서는 5시간도 채 못 잤는데도 신기하게도 전혀 피곤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바짝 긴장한 채로 마음을 졸였었는데 이렇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다른 날도 그렇긴 했지만 오늘은 더욱더 여행자로서의 하루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적인 하루 같았는데,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일상의 소소한 여유와 행복들이 때로는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구나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일은 또 어떤 놀라운 하루가 될지 이제는 두근두근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