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는 나에게 불필요한 사람에게 힘과 시간을 낭비하고 결국 상처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매우 위협적인 이유는 상처받은 내가 좋은 사람에게도 방어적으로 굴게 되는 데에 있다.
나에게 오는 좋은 사람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좋은 에너지를 빼앗기고 만다.
인간관계란 정량적이지 못해서, 결코 내가 하는 대로 돌려받기 어렵고 내가 마음 쓰는 것을 상대가 전부 알아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일정량의 주고받음이 있다.
내가 한 번 사면 상대가 한 번 사는,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마음을 쓰는 것의 주고받음도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나는 주고 받음이 희미한 사람은 '좋은 사람' 카테고리에 넣지 않는다.
주고 받음이 희미 했던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오거나, 베풀게 된다면 그들은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매우 한시적인 일일 것이다.
내가 편한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잘 모를 때에는 '나의 감'을 믿으면 된다.
객관적으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더라도 이상하게 나에겐 불편한 감정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서로가 보는 시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승진에 관심이 없지만 나의 친구는 승진에 관심이 많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할 수도 있다.
나는 돈을 그렇기까지 벌고 싶지 않지만,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서로가 보는 시야의 차이에 의해 나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서로가 너무 다르다면 결국 누군가 한 명은 상대에게 맞춰야 하는데, 그것이 나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면 괜찮다. 하지만 불편함을 준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착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나는 불편한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 카테고리에서 쉽사리 정리를 하지 못하고 그 사람으로 인해 고통받곤 한다(오히려 객관적으로 착한 사람이 주위 사람에겐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하지만 그 사람이 타인에게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나와는 관련이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상대에 대해 좋은사람인지 나쁜사람인지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지키고자, 혹은 나에게 좋은 사람에게 더 잘하고자 내 마음속의 카테고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 내가 편한 감정을 느낀다면, 일단은 그 느낌이 가장 정확한 열쇠가 된다. 이것은 '좋은 감정'과 조금 다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가 상대를 만나 자신감이 생기거나 행복한 기분까지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다.
반대로 그 사람이 타인에게 비치는 모습이 어떻든, 내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만나고 나서 우울해진다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란 용어를 썼지만 그들은 나와 시야가, 가치관이 다른 것뿐이다. 그들과는 물 흐르듯 지내면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고, 이유 없이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나를 사랑하는 사람, 즉 '좋은 사람 카테고리'에 있는 사람들과는 나는 즐겁고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