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에서,

23년 12월 말의 로마의 기억

by 정현주 변호사


13시간이 넘는 비행과 생각보다 많은 짐들로 인해 몹시 피곤한 상황이지만 짧게라도 글을 남겨 본다. 나는 이탈리아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막상 지도를 살펴보니, 이탈리아 주변의 다른 많은 나라가 많이 익숙했다. 예를 들면 베네치아 바로 옆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가 그렇다. 그 왼쪽으로 붙어 있는 프랑스의 파리에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유럽을 다시 온 것은 상당히 오래간만의 일이다.


나에게 로마는 언젠가 반드시 오고싶었던 이데아와도 같은 곳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내가 간 나라들은 보통은 비행기표가 싼 이유나, 여행을 하다가 무심결에 들르게 되는 곳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그것도 집을 잃은 히피와 같이 떠돌던 시절에는 사실 어디를 가는 것이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

혼자 여행을 하던 그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하얀 도화지와 같은 어린 딸을 데리고 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행에서의 기억이 어떻게 남든(혹은 완전히 사라지든) 아이에게 언젠가 다른 상황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간 경험했던 것들이 낯선 것들에 대한 두려움 사라지게 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기억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경험했던 것들은 어딘가 분명히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런 사소한 조각들이 쌓여 전체를 이룬다고 나는 믿는다. 분명히.

로마는 생각만큼 춥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언젠가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유럽에 처음 왔을 때의 삭막한 느낌,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의 위로. 언제나 똑같은 느낌의 두꺼운 문, 문을 닫쳐야 비로소 덜컥하고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긴 시간 속에서, 변한 것은 오로지 나다. 나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때보다는 훨씬 더 시간이 사라졌고 많은 것들에 얽매이게 되었으며, 여전히 정제되지는 않더라도 완전한 날 것의 상태가 어느 정도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일정의 여행을 떠나고 있다. 언제나 나에게 여행의 의미는 쉼, 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머무른다면, 어떤 장소의 어떤 기억들은 단지 그리움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에게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 장소는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나는 이탈리아에 여행을 갔었던 한 친구로부터 산타마리아 노벨라에서 사 온 사각형의 예쁜 방향제를 선물받았다. 작은 장미가 말려진 채 들어간 비누와 같이 예쁜 외향이며 은은한 플로럴 향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는 줄곧 집에 있는 세면대 위에 그 방향제의 끈을 묶어 올려두었다. 그때 친구는 ' 이곳에 오니 너 생각이 정말로 많이 났어. 트레비 분수를 걷는데 너와 함께 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함께 걸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말했다. 사랑은 그렇게 어떤 장소에 머물러 있다.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어렴풋이 그 느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변한 시간 속에서 오래전 홀로 떠났던 긴 겨울의 유럽과 그때 보았던 장소로 다시 미끄러지듯 찾아오니 어떤가? 물론 바깥 세계의 연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그대로 보이는 내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나는 과연 원하는 만큼, 원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함께 있지만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같은 장소를 보고 있지만 기억되는 경험은 다르다. 어떤 이에게 감정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될 테지만, 어떤 이에게는 평생을 간직하는 빛과 같은 것이다.


그때의 나는 빛을 찾았지만, 지금의 나는 빛을 잃었다. 그렇게 흩어진 상태로 이 곳에 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