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가혹해지고 측량할 수 없는 고독감으로 위태로워졌다

무엇인가를 얻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by 정현주 변호사


나의 삶은 점점 더 가혹해지고 측량할 수 없는 고독감으로 위태로워졌다. 물론 삶이 그렇게 동요할 때마다 무엇인가를 얻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진화되었다. 예를 들어 오래전의 나는 완전한 자유를 위해 정신적인 깊이를 바랐다. 그리고 생각보다 치열했던 정신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나의 내면은 분명 많은 것들에게서 해방되었고, 그것은 오로지 정신적인 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삶의 동요가 없이는 단지 평이한 안락함 외에 빛나는 어떤 것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내가 빛을 찾으려 할 때 당연하지만 깊은 어둠을 숙명적으로 건너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의 문제는 일단 어둠 없이는 빛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때때로 우리는 바로 앞에 빛나는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그 이후에 그런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그 빛을 깨닫기 전까지 적절한 상황에 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경험치가 부족하기 때문인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다.



모든 사람은 내면의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캄캄한 어둠 속에 던져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분명 빛이 그 근방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간에.



하지만 물론 고통이 찾아오면 나는 불타오르는 집에 꼼짝없이 갇힌 것처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물론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쓴다. 하지만 이런 무의미한 노력은 물론 그 고통이 완전히 연소되어 종료되기 전까지 피하기는 어렵다. 이럴 거면 차라리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 뻔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생각했다. 왜 나는 '유독' 고통에 민감한 것일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닥쳐 고통이 밀려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면 현상은 현상대로 그냥 두는 좋은 방법이 있음에도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한동안 찾지 못하다가 우연히 친구의 말을 듣고 그 힌트를 얻었다. 친구의 말에 의하자면 나는 어떤 현상에 빠지면 '몰입'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시야가 무척 좁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몰입을 위해서는 강렬한 감정의 동요가 필요하다. 당연히 내가 몰입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몰입의 끝. 을 정할 수도 없다.



어찌 되었든 몰입을 한다는 것은 타고난 성향에 가까운 것인데 사실 이런 기질은 예민한 사람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몰입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원하는 것을 이루기에는 적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정신적인 고통이 심해지기에 원하는 것을 이루는 즉시 대상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도 하고 마치 정교한 도자기를 빚는 장인들처럼 조금이라도 흠집이 있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도자기가 나오면 그것의 사회적 가치가 얼마가 되는지에 상관없이(사실 도자기 장인들은 부를 신경 써 본 적이 없으므로 사회적 가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깨버리거나 없애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왜 굳이 '없애는 것'을 선택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예민한 사람들은 감정의 잔해, 즉 무엇인가 남아있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도자기 장인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도자기를 만들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만드는 순간, 그 대상에 대한 흥미는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들은 그것을 만드는 것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또한 몰입의 과정은 행복하기도 하지만 고통스럽다. 행복과 고통은 빛과 어둠처럼 극명하게 대비될수록 몰입을 더욱 심화시키게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몰입을 하는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고통에 민감하며 이를 상대적으로 흔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그 고통이 끝나면서 자신의 목적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나는 운명이 준 경험과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 제3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의 핵심은 어떤 대상과 상황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소유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상의 움직임은 당연한 것으로 그대로 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어떤 상황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또는 소유를 하려는 순간, 그 지점에서 고통은 선택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 나의 빛을 취하거나 또는 가져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최소한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필요한 것을 취하면 된다. 물론 상대방의 인생에 큰 접점이 없는 한도에서. 이것이 나의 선택이었고 처음에는 잘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무리 보이지 않는 곳에 우물을 만들고 그 외양을 흙으로 덮는다고 하더라도 사소한 사건들로 인해 많은 것들에 공명을 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처음과는 생각하지 못했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물론 알 수 없었다.






사실 고통의 와중에서도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 끝에 측량할 수 없는 정신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고, 사실 그것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 또한 욕심이나 욕망으로 불릴 수도 있겠다. 또한 고통을 내가 선택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나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것이 만약 나의 선택이나 욕망으로 된 것이었다면 좀 더 깔끔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계속적인 혼돈이 존재했다.




거친 파도가 지난 이후 바다가 잠잠해지듯이 지금은 헤매는 고독과 위태로움 덕분에 점차 평온해졌다. 새삼스럽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핍으로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의 나로서는 완전히 받아들이기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이 헤아릴 수 없는 고독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나를 이루거나 또 내가 이루어낸 것들에 대한 어떠한 안정감 소속감도 그것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정신적인 자유를 얻었지만 타인으로부터 영원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과도 같은 것이다. 난 내내 얼어붙은 서리와 같은 곳에서 필요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내가 이 길을 계속 가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순간, 동시에 나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뛰고 있으며 평온함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상 거의 ㅡ 절대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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