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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Sep 27. 2024

나의 의뢰인의 상대방을 재판에서 만났을 때.

법률사무소 봄 정현주 변호사



1. 변호사님, 진짜 사실을 알고 그 사람을 변호하고 계신 거예요?


그야말로 몇 달 만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갔다. 조정실이 많지 않은 다른 법원들과 달리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조정은 굉장히 많다. 조정은 본관이 아닌 별관에서 이루어지고 바로 앞의 화면으로 진행 상황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조정을 기다리면서 바로 앞 조정실에 앉아 있으려니 처음 보는 얼굴의 남성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 변호사님! 정현주 변호사님 맞으시죠? '


대체 누구시길래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내가 그를 바라보자, 남자는 사건의 상대방이고 이름이 누구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 아.. 네. '


가끔 의뢰인의 상대방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어느 정도 긴장을 하고 마음속의 거리를 잰다. 어떤 말이 나오든 나는 적절하게 대응을 해야 하기에.


' 저 변호사님이 쓰신 서면을 읽어 봤는데요.. 저 진짜 사실을 알고 계신 거예요? '


그의 말은 이렇다. 나의 의뢰인은 굉장히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며 예전부터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실 확인을 거치지도 않은 채 그의 변호사는 의뢰인의 말만 듣고 서면을 썼다. 그런 취지의 말이었다. 그의 말을 듣자, 소장을 받은 의뢰인들과 상담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들이 머릿속에 스쳐 갔다. ' 변호사님. 이 변호사 좀 이상한 거 아니에요?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고 이렇게 마음대로 글을 써도 되는 거예요? '


소송에서의 사실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믿는 것이 과연 사실이 맞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명확한 증거가 있어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이란 사실 주장에 가까운 말이다. 서로가 주장하는 사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소송으로 번지게 되는 것이다. 변호사는 물론 나의 의뢰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만약 서로에게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더더욱 의뢰인의 입장에서 (사실 그것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때로는 공격적인 서면을 쓰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 네 선생님, 저는 ***씨의 변호사라서요. ***씨의 입장에서 변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억울하신 부분은 알겠지만 서로의 입장 차가 있을 수 있을 거예요. '


한편, 의뢰인의 상대방에서 봤을 때 소송의 상대방이나 그의 변호사가 예뻐 보일 리가 없다. 당연히 똑같은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을까? 변호사의 일이라는 것이 의뢰인을 위해 대신 싸워주는 것이니 말이다.



2. ' 너, 변호사 살 돈은 있고, 우리 딸에게 줄 돈은 없다 이거지? '



몇 달 전의 일이다. 조정을 기다리며 오래간만에 의뢰인을 만났다. 보통 변호사와 의뢰인의 상담은 첫 만남과 두 번째 만남이 가장 길고 그다음부터는 작성한 서면을 주고받으면서 서면에 대한 수정 보완, 또는 상대방 서면에 대한 입장, 증거들을 제출하며 이어지기 마련이다. 재판은 통상 변호사가 혼자 출석하고 의뢰인과는 전화를 통해 소통하게 되므로 변호사와 의뢰인은 소송 중에도 생각보다 계속 만나기가 어렵다.


이혼 조정을 앞둔 의뢰인은 마음이 무척 후련한 듯이 보였다. 우리는 상대방이 조정실에 있는 동안 바로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아 이혼과 상관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중년 여자분이 나타났다.


' 너, 변호사 살 돈은 있고, 우리 딸에게 줄 돈은 없다 이거지? '


그녀는 의뢰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옆에 앉아 있던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입에 담기 힘들 욕들을 하시기 시작했다. 얼마나 큰 소리로 외치셨는지 복도에 앉아 있던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욕들은 꽤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 네가 무슨 돈이 있어 변호사를 사? '


의뢰인과 나는 조정실 의자에 앉아 그녀의 욕과 삿대질을 꽤 오랜시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욕을 하면서 점점 더 흥분하시는 것으로 보였는데(대부분의 경우 감정의 분출은 더 큰 감정의 분출을 몰고 오게 마련이다), 나로서는 그 순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지를 생각해야 했다. 의뢰인이 공개적으로 명예훼손을 당하는 상황에서(심지어 금방 끝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얼른 법원 경비를 불러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의 거리가 나와 무척 가까웠고 감정적으로 너무 흥분 상태로 보였기 때문에 나는 차라리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예상대로 감정의 끝까지 가더니 이윽고 가지고 있던 가방으로 의뢰인의 머리 부분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최소 몇 분간 계속되었다. 나는 바로 옆에서 의뢰인과 함께 욕을 들으면서 안타까운 그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얼른 조정실의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조정이 시작되자 의뢰인은 조정위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 아까 제가 욕을 듣고 맞았는데, 제가 왜 돈을 줘야 하죠? 이혼하고 헤어지는 것이 어떻게 한 사람의 잘못만으로 됩니까? 저는 욕도 먹고 돈도 줘야 하나요? '


맞는 말이다. 심지어 위자료 조로 의뢰인이 상대방에게 돈을 준다고 한들 그들이 그것을 고마워하겠는가? 어떻게 하든 그들은 의뢰인을 욕하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빨리 끝내는 것이 의뢰인에게 가장 좋지 않을까? 억울함과 분노로 소송으로 가서 의뢰인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 긴 시간을 이 일에 매인다는 것이 가장 큰 지옥이다.


' 물론 당연히 화가 나실만하죠... 그런데 제 생각에는, 그냥 달라는 돈 줘버리고 여기서 빨리 매듭을 짓는 것이 어떨까요? 어차피 소송을 진행하게 되면 변호사 비용이 더 나오게 됩니다. 그 돈을 그냥 버린다는 셈 치고 상대방에게 주시면서 그냥 여기서 정리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지금 보세요. 만약 지금 돈을 안 주고 소송 간다고 하면 계속 괴롭게 하겠죠. 지금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


나는 그렇게 의뢰인을 설득했다. 어차피 상대가 요구하는 돈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보더니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도 얼른 정리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기에.


소송 당사자인 의뢰인은 자주 감정적이기 마련이다. 변호사는 소송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가오나시와 같이 옆에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든든한 아군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가 무척 흥분상태일 때는 가장 적절한 조언을 해 주기 위한 일을 담당하기도 한다. 소송에서의 승패와 별개로 상황을 적절히 마무리짓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


오래간만에 간 서울중앙지방법원, 벌써 가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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