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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Nov 11. 2024

생각해 봐야 할 시기가 왔다.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주기적으로 염색을 한다. 개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염색을 시작했으니, 이제 2년이 넘은 것 같다. 한 번 염색을 시작하면 뿌리 염색이든 전체 염색이든 멈출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최대한 염색을 시작하는 때를 줄이고 싶었는데 결국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시기는 오고야 말았다.

 

지난주 일요일, 늘 가던 미용실에 가서 오래간만에 전체 염색을 하고 조금 달라져 보이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조금 옅어졌던 내 밝은 머리는 어두운 검은색 머리로 변했다. 그래서일까, 대비적인 나의 얼굴은 어딘가 하얗고 창백했다. 두쪽이 다른 나의 쌍커풀도 어딘가 조금 달라보였다.


어떠한 일이든지 한 번 시작하면 지속성이 생긴다. 한 해에 여행을 한두 번 나가기 시작하면 여행을 하지 않은 채 일 년을 그냥 넘기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고, 일을 시작하면 그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현재 나의 삶이 불행하더라도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보다는 불행을 유지하는 쪽이 좀 더 마음 편하게 느껴진다.


책임도 마찬가지여서 한 번 시작된 책임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일을 시작하다 보니 의뢰인과의 관련된 경우뿐만 아니라 사무실 또는 가족 간의 문제에서도 어느 순간 나는, 무한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자유롭게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때와 전혀 다른 지금은 때때로 그 책임이 무척 버거울 때가 있다. 한편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오히려 나에게 기대려 할 뿐 내가 백 미터 달리기를 뛰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서는 내가 조금 더 좋아 보이는가 싶다. 그들은 늘 그렇듯이 나에게는 왜 조금 더 신경 써주지 않아?라는 말을 한다.


나는 너에게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는 왜 조금 더 신경 써주지 않아?


나는 그 말에 부담을 느껴 그곳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가장 최악의 상황은 '부담을 받는 것'이다. 현실의 내가 아니라 야생에서 사는 이리의 입장에서, 이미 충분히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쉴 곳을 찾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될 거란 사실을 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부담을 주는 것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아무리 마음이 산산조각 나더라도.


과거의 나라면 훌쩍 떠나면 그만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이 묶여있으니 이 깊은 뿌리를 잘라내지 못해 괴로움을 느낀다. 절망에 가득 찬 마음으로 새벽에 눈을 뜬다. 시계는 아직 새벽 3시, 이 어둠과도 같은 시간은 늘 한결같이 멈춰있다. 시곗바늘이 어느 시점에 완전히 멈춰버렸다.


사방이 어둠에 깔려 있다 보니 나는 이 어둠이 익숙하다. 조금도 뒤틀리지 않는 고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찾고 싶지만 이곳에 있는 한 나는 빛을 보기 어렵다. 이 굳어버린 뿌리를 어떻게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쉽지가 않다. 생각해 보니 꽤 오랫동안 울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을 나는 내면만을 바라보면서 오로지 그림자 분리 작업을 해 왔던 것이다(떠날 수 없는 나로서는 방법은 하나였다).


그때는 실체를 어디에 둬야 할지에 대해서까지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ㅡ 찬찬히 생각해 봐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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