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잠든 새벽에, 나는 너를 보았다.

by 정현주 변호사


오래간만에 한 밤중에 눈을 떴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시간은 오전 4시 반을 넘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거실에 나와 음악을 듣기로 마음먹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찾았다.


잦은 여행과 출장 덕에 나에게는 한 쪽의 이어폰만 남은 비슷 비슷한 블루투스 케이스들만 남아있다. 해외 직구로 어렵사리 '한 쪽 이어폰'을 구매하는 것도 이제는 적당히 오래되었다 싶어, 며칠 전 큰 마음을 먹고 제대로 된 에어버즈를 구매했다. 실버와 검은색이 어울린 케이스는 얼핏 보아도 세련되었다. 실버로 만들어진 본체는 대단히 날렵하게 생겼지만 아날로그 감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약간은 구닥다리 디자인이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나와 같이 변해가는 시절에 익숙치 않은 오래된 사람들에게는 어울리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어캡은 늘 그렇듯이 나에게 맞지 않았고, 나는 따로 스몰사이즈 이어캡을 따로 구매해야 했다)


이렇듯 그다지 피곤하지 않은 밤에 깨어난 새벽녘의 시간은 나에게 여분과 휴식의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 3시와 4시가 지나가는 시간은 해야할 일들이 아무것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 산 에어버즈를 귀에 꽂고 최근 빠져듣기 시작한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듣기 시작했다. 곡은 슈베르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나는 눈을 감고 피아노 소리에 빠져든 채 어제 카페에서 마셨던 호지차의 씁쓸한 뒷맛을 떠올린다. 그 아릿한 맛은 나의 혀끝에서 이 사이로 스무바퀴 정도 맴돌다가 입술 근처로 사라진다.


' 어때? '


너는 묻는다. 나의 씁쓸한 입술 사이에서 들려 오는 꽤 먼 목소리다. 어디에서 들리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오래 전에 사라진 줄 알았더니.


' 뭐가? '


나는 아무런 억양이 없이 건조하게 대답한다. 벽에 부딪혀 울리는 나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갑다고 느낀다. 나는 어쩌면, 오래간만에 나타난 너가 반가운 것일까?


' 결국 찾게 된 거야? 너가 찾았던 것들을 말이야. '


너는 아랑곳없이 느릿한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톤은 약간 고조되어 있다. 마치 내가 말할 답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 글쎄ㅡ '


그리고 나는 감고 있는 눈을 떴다. 너는 내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있다. 목소리만 남은 희뿌연 유령처럼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70년대에서 볼 법한 지지직거리는 tv의 화면처럼 너의 형체는 흔들린다. 언뜻 보아도 너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일단 너는 수십년전에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바로 앞에 앉은 너가 현재 시점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 여전히 너는 헤매이고 있지? 최근까지는 답을 찾는 과정에 아주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


너는 나에게 말했다. 마치 일직구로 날아가는 배드민턴의 셔틀콕처럼.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의 음악이 귓가에서 들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다행이다. 나는 그렇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 맞아. 난 헤매이고 있어. '


그리고 방향을 정했지. 다만 예전처럼, 타인의 마음을 더 이상 살피지 않아. 그것은 무척이나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이야.


' 그래 나도 그랬어. '


너는 다리를 꼬고 잠시 한 숨을 내쉬었다. 아주 길고도 긴 한숨이었다. 여전히 tv속의 불명확한 화면처럼 지지직거리는 모습으로. 그 장면은 점멸하는 불빛처럼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그 몇 초가 지나간 사이 너는 잠시 테이블 아래를 보았다. 아래를 볼 때의 속눈썹은 마치 현악기의 가지런한 스트링을 연상케했다.


나도 늘 그랬어. 사실은 헤매고 있지만 겉으로는 수도 없이 멀쩡한 척을 해야했지.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해 나는 그야말로 갖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어.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방황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얼마나 나이가 먹어야 이 세상에 익숙해져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온전할 수 있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지. 끝없이 긴 과정이었어. '


너는 말했다.


결국 부모님이 바라는, 또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바라는 나의 모습은 처음에는 작은 반발이었지만 결국 나 스스로 내가 원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어.


그리고 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물 한잔을 줄 수 있겠어? ' 유령이 물을 마신다니, 상당히 괴이한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당연한듯 일어나 컵에 물을 따라 주었다.


우리는 한 때 같은 꿈을 꿈었었지. 그때 우리는 완전했어. 왜 사람은, 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 인생의 대부분을 머저리처럼 흘려보내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걸 ' 어쩔 수 없었어.'라고 생각하며 합리화하기도 하는거야. 스스로의 삶임에도 방관자로 지내듯이. 나는 그 긴 시간동안 외로웠어. 어떤 고독은, 일종의 고통처럼 그 순간에는 제대로 자각조차 하지 못하지. 어떤 감정들은 그런거야. 때때로 너무 큰 감정들은 그 크기로 인하여 제대로 된 인지로 하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리고 말지.

을 여행했는지. 그리고 이별 뒤에 찾아왔던 수 많은 만남들과 또 다른 이별들을, 헤어짐을, 마멸되고 사라진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렇게 점멸하던 빛들이 사라진 이후에도 결국에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만 남았어. 오로지 존재하는 것으로만.


' 나도 그래. '


나는 너에게 마음으로 말했다.


나도 너와 같아. 너무 많이 헤매었을 뿐. 그리고 여전히 헤매일 뿐.


커텐이 있는 오른편 창에서는 커다란 태양이 이글거리듯 떠올랐다. 그 빛은 주위의 어둠을 하나둘씩 지워가고 그 근처를 조금 더 옅은 색깔로 물들였다. 조만간 더 깊은 산속에서 가장 이른 아침의 새가 지저귀고 어김없이 어제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 그럼 안녕, '


나는 말했다.


다시 너를 떠올려서 미안해. 어쩌면 나는 꽤 오랫동안 절망에 차 있었는지도 몰라. 늘 온전하게 너를 이해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걸렸어.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나 스스로의 문제로 가득 차 있었지.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삶이란 살아있을때는 늘 종말을 생각하지 못하지만 불현듯 허무하게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늘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나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하며 무엇을 가장 지켜야 하며 무엇이 나를 가장 행복에 이르게 하는 일일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정말로 그래.


그리고 나는, 너의 눈빛을 보았다.


(어쩌면 나의 글을 좋아할 수 있는 아마도 소수의 독자를 위해 글을 남긴다. 글을 쓰는 일은 꽤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심지어 어떤 반짝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다음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꽤 큰 날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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