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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형 Sep 16. 2018

차라리 에어팟을 몰랐더라면

에어팟을 잃어버리고 떠난 어떤 애플 덕후의 이어폰 방황기

에어팟을 잃어버렸다. 남들은 한쪽씩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할 때, 시원하게 케이스까지 통째로 잃어버렸다. 에어팟의 다른 한쪽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꽤나 잔혹하고도 허무한 처사였다.

분실을 하지 않기 위해 몸까지 서슴없이 내놓는 에어팟느님의 위대함

'약 10개월을 썼으니까, 한 달에 대충 2만원 꼴. 그동안 유선 이어폰 끊어지고 분실했던 가격을 생각하면 월 2만원쯤은 아무것도 아니지'라고 생각하며 정신 승리를 하고 있을 때쯤, 위기는 불현듯 찾아왔다. 어쨌든 음악은 들어야 사는 내게 이어폰 재구매의 시점이 온 것이다. 그러나 당장 에어팟을 사기엔 뭔가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때부터 다시 에어팟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이어폰을 찾아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황의 결과물을 오늘 살짝 말해보려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여정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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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이어폰은 이제 몹쓸 물건이 되어버렸다.


바로 서랍에 있던 벌크 유선 이어폰을 꺼냈다. 사실 에어팟을 모르기 전까지는 기본적으로 애플에서 제공해주는 이어폰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공짜로 주는 놈 치고는 그래도 들어줄만한 수준이었고, 흰색으로 미니멀하게 떨어지는 깔끔한 디자인도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기본형 이어폰에서 기대하기 힘든 수준의 통화 품질은 이 녀석을 찾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에어팟을 경험한 탓일까, 기본 이어폰은 마치 쇠사슬을 묶은 듯 형벌을 받는 기분을 들게 했다. 이어폰 선이 꼬일 때마다 이어폰을 잔뜩 높게 들어서 꼬인 선을 하나씩 돌돌 돌려 펴주는 것도, 이어폰을 꺼내 바로 음악을 듣지 못하고 주머니 속에서 꼬인 이어폰을 펴고 앉아있는 것도, 걸어가다가 팔에 걸려 귀에 꽂힌 이어폰이 귓구멍을 강타하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까지. 모든 순간들이 몹쓸 순간들이었다. 심지어는 지나가는 에어팟 유저들을 보면 묘한 패배감까지 들었다.


유선 이어폰 쓰고 에어팟 유저를 만나면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또 까먹고 있었던 게 있다면, 유선 이어폰 특유의 선에서 전달되는 소음이었다. 유선 이어폰은 선을 건들면 그 선을 건들면서 나는 소음이 그대로 귓속으로 전해진다. 아무리 음질이 좋아도,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하면 참을 수 없는 그 소리 때문에 더는 참지 못하고 한 시간만에 이어폰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른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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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 무선 이어폰은 생각 이상으로 불편하다


그 대안으로 찾은 것이 세미 무선 이어폰이었다. 그러니까 목에 거는 방식의 무선 이어폰으로, 유선 이어폰보다는 덜 불편하면서도 무선의 장점을 취할 수 있는 이어폰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목에 칼을 찬 듯 거대한 플라스틱이 얹혀 있는 이어폰은 제치고 시작했다. 그 녀석들의 음질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냥 멋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아직 그들의 멋을 내 목과 어깨에 걸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같다. 혹자는 그런 이어폰들의 편리함과 나름의 멋에 대해 어필하지만,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멋진 척 해도, 민망하다는 것 알고 있어요 누나


그래서 대안으로 찾은 것이, 닥터 드레의 Beats 시리즈였다. 목에 플라스틱 대신, 아주 약간 두꺼운 선으로 거치 문제를 해결한 묘한 기기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미니멀해 보이는 Beats X 가 마음에 들었다. 닥터 드레는 원래 깡통 음질로 유명했지만 애플 인수 이후에는 나름 개과천선했다는 소문도 들었고, 또한 에어팟보다도 조금 저렴한 가격도 한몫했다. 게다가 애플 공홈에서 파는 물건이 아니던가. 애플이 공식적으로 파는 물건이라면 달라도 뭐라도 다를 것이란 생각에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도 완벽한 대안은 아니었다.


우선 아무리 무선이라 할지라도, 목과 귀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선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예전에는 이 정도만 해도 혁신이었을 것인데, 한 번 완전 무선의 미래를 경험하고 온 내게 '선'이라는 존재는 불필요한 존재 그 자체였다. 음악을 듣지 않을 때 에어팟은 그저 케이스에 넣고 보관하면 끝났지만, Beats X는 어쨌든 목에서 걷어내거나, 계속 거추장스럽게 목에 걸고 있어야만 했다.


다른 대안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불편한건 여전했던 Beats X

블루투스 페어링도 불편했다. 에어팟의 연결 과정은 간단하다. 케이스를 열고, 귀에 넣는다. 하지만 세미 무선 이어폰들은 그렇지 못하다. 어쨌든 버튼을 눌러 페어링이 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Beats X가 W1 칩을 갖고 있어 애플과 호환이 더 뛰어나다 하지만, 연결이 되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은 어쨌든 에어팟에서는 없던 경험이었다. 오히려 이건 유선 이어폰보다도 불안한 부분이었다. 유닛을 귀에 꽂으면 반드시 음악을 들려줄 것이라는 확신은 포터블 오디오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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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완전 무선 이어폰은 성에 차지 않는다


그렇게 헤매고 나서야 다시 완전 무선 이어폰의 세계로 돌아왔다. 사실 에어팟 말고도 대체재는 많은 편이다. 다만 조금 쓸만한 녀석들은 에어팟보다 무조건 비쌌기 때문에 쉽게 도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미 헤맬 대로 헤매고 온 마당에, 가격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하나씩 다른 이어폰들을 경험해보기 시작했다.


10만 원대의 저렴한 이어폰들은 애초에 시도해보지도 않았고, 나름 비교대상이라고 불리는 3종의 이어폰, 그러니까 소니의 WF-1000X, 자브라의 Elite 65T, B&O의 E8 이 그 비교대상이었다.

왼쪽부터 소니 WF-1000X, 자브라 엘리트 65T, B&O E8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조금씩 에어팟에 비해 아쉬운 것들이 있었다. 우선 소니의 WF-1000X는 에어팟보다 좋은 음질을 선사해주지만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참을 수 없을 만큼 연결이 끊기는 안방 호랑이의 위용을 자랑한다. 게다가 케이스는 보조배터리 수준으로 커서 주머니에 넣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자브라의 Elite 65T는 그나마 오래 썼던 이어폰이었다. 이어폰보다 비싼 가격은 부담스러웠지만, 방수 기능은 발군이었고 커널 이어폰 특유의 차음도 한몫했다. 그러나 이미 중저음에 세뇌된 귀를 가져서일까, 애플 기본 이어폰만 못한 수준의 음질과 빈약한 중저음은 늘 아쉬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이어폰 나눠 듣기' 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에어팟은 두 유닛이 떨어져 있어도 한쪽씩 귀에 꽂고 다른 사람과 음악을 들을 수 있었지만, Elite 65T는 그게 안됐다. 뭐 그럴 일이 별로 없다면 중요하지 않지만, 잠깐 다른 사람에게 음악을 들려주려고 할 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2018년의 수지는 당신에게 유선으로 전람회를 권하지 않을 것이다. 명심해...


B&O의 E8은 음질도 좋고, 디자인도 예쁘고, 다 좋았지만 너무 비싼 가격과 연결 시의 비 직관적 UX 때문에 탈락했다. 연결 시에 몇 초간 손 끝으로 유닛에 손을 대고 있어야 하며, 버튼이 아닌 터치 방식이다 보니 확실히 연결되었다는 확신을 받기가 어려웠다. 계속 터치로 이어폰을 만지작해야 하는 기본적인 UX 때문일까, '내가 이 돈 내고 계속 불안해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물론 학습하면 점차 나아지겠지만, 에어팟은 애초에 그런 학습조차 필요하지 않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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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 없는 미래에 살 수밖에 없다.


애플이 에어팟을 처음 세상에 공개하던 2016년 어느 날. 사람들은 3.5파이 단자를 아이폰에서 제거해버린 애플의 결정을 아쉬워하다 못해 과도하게 비난했었다. 필자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애플은 당시에 에어팟을 소개하면서, '선이 없는 미래로 당신들을 인도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마치 이 결정이 그동안 중요한 순간마다 핵심 장치들을 제거했던 오디오 기기들의 역사를 되짚으며 자신들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당시엔 솔직히 좀 졸렬하다 생각했다. 그러기엔 20만 원을 웃도는 이어폰을 모두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때 까지만 해도 팀쿡 아저씨가 억지를 부리는 줄 알았는데, 억지는 내가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선이 없는 미래에 살다온 내게, 이제 무선은 이어폰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물론 무선 이어폰도 발전할 여지가 많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자주 끊기는 것은 어쨌든 유선 이어폰에서는 없는 경험이고, 대부분의 경우 유선보다 음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도 개선의 여지가 필요한 부분이다.


다만 하이엔드가 아닌 유저들에게 무선의 불편함이 과연 유선의 불편함을 이겨낼 만큼 치명적인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하다. 혼잡한 곳에서의 간헐적 끊김이 유선 이어폰의 소음만큼 불편할 것인지, 3.5파이 단자의 부재가 선 꼬임만큼 불편할 것인지, 분실의 우려가 기존 유선 이어폰 분실과 단선만큼 큰 것인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적어도 내가 썼던 에어팟은 그 모든 불편함을 불식시킬 만큼의 경험 개선이 있었고, 다시 유선과 세미 무선으로 돌아온 내게 에어팟의 불편함은 몹시 사소해 보였다.


서두가 좀 길었다. 본론과 결론을 말하자면, 에어팟 사라. 두 번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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