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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형 Feb 26. 2022

MBTI를 먼저 묻지 않는 일

알파벳 4개로 누구도 재단하지 않는 삶에 대하여

어떤 대기업의 자기소개서 문항에 MBTI를 적으라고 했답니다. 저는 이런 세상을 가장 걱정했어요. 전국민이 재미로 시작한 일을 일부가 다큐로 받아들이는 이런 일을 말이죠.


그 소식을 전한 신문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습니다. 


"홍보직군 써야하는데, 눈물을 머금고 INFP인 원래 결과 대신 ESFJ로 냈습니다."


저는 그 댓글을 보고, 세상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사람들이 MBTI를 시작했을 땐 본인의 결과가 궁금해서였을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달까요.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알듯이, 내 결과보다는 타인의 결과를 더 궁금해하는 세상입니다.


MBTI는 타인을 평가하는데 굉장히 쉬운 도구입니다. 이 도구에겐 상대방의 MBTI를 듣는 순간 '아, 어쩐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치 내 모든 삶을 알파벳 4개로 단번에 평가받는 기분이랄까요.


요즘 어떤 모임을 가던 MBTI를 먼저 묻는 모습을 종종 목격합니다. 서로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어떤 성격인지를 미리 파악하려는거죠.


상대방의 MBTI를 듣고 나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이마 위에 MBTI가 인쇄되어 있는 기분이랄까. 마치 만화 데스노트처럼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기분이 듭니다. 그가 내뱉는 모든 말들이 MBTI와 엮여, 그를 단 번에 이해한 기분도 들죠.

물론...MBTI는 재미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장난감...


그런데 말예요, 제가 아주 오래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알고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을 깊게 알아가는데 있어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을 잘하고 싶어 책 한권 읽는다고 단번에 일이 잘되진 않는 세상, 주식을 잘하고 싶어 유튜브 한 번 본다고 상한가가 되는게 아닌 세상인것처럼.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도 MBTI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건 어렵습니다.


그래서 MBTI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전부가 아닌, 이해의 시작이자 첫 문입니다. 그 사람의 옷, 말투, 눈빛, 웃음, 기분, 다정함, 예민함처럼 그를 이해하는 수 많은 것들 중 하나입니다.


MBTI는 그러니까 모자같은 겁니다. 모자를 썼다고 그를 단번에 이해할 수 없듯이, 이 야속한 알파벳 4개의 조합은 MLB 뉴욕 양키즈 뉴에라 모자쯤 정도로 취급해야 합니다.


본인의 MBTI를 자책하거나 태도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봤어요. '나는 F라 글렀어, 나는 T라 네 감정을 잘 몰라, 나는 P니까 그런 일은 못해요' 같은 말들이요.


MBTI를 알기 전에는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그러니까 상대방이 기분이 나쁘다면 알아주려고 애써도 보고, 계획을 잘 못세운다면 잘 세워보려고 노력하고, 너무 감정적일 때 스스로를 바로 잡으려고 애쓰는 존재들이었으면서. 알파벳 4개만 알고 나면 주저 앉아 버립니다.


우리는 알파벳 네 개보다 더 섬세한 존재입니다. 저는 압니다. 저희 어머니가 ISTJ라도 싱어게인을 보다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저희 아버지가 ENTP라도 아들과 며느리에게는 말싸움 대신 따뜻한 안부와 선물을 주는 사람이라는 걸요.


회사 일에는 냉정할지라도, 가족 일에는 따뜻할 수 있는게 사람이니까


본인의 MBTI를 맘에 들어하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사실, 아세요? 그만큼 타인에게 한 번에 재단 당하고 있는 사실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본인은 상대방을 쉽게 평가하고 싶지만, 나는 한 번에 평가 당하는 건 싫은 이율배반적인 상황이랄까요. 


공자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건 남도 하기 싫은거니까 그러지마' (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알파벳 4개보다 섬세한 존재이고 싶다면, 우리도 상대방을 너무 쉽게 판단하려고 하지 맙시다. 세상에 간파하기 쉬운 것은 없고, 간파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요즘 MBTI를 먼저 묻지 않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건, 남도 하기 싫으니까.


* 글은 뉴스레터 검치단 Playlist & Letter 에서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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