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키 160cm의 작달막한 여자다. 생김새는 수수하고 말하는 속도가 느린 데다 행동도 어수룩하다. 번화가에 가면 높은 확률로 '기가 맑으시다'며 무속신앙 전도사가 말을 걸어온다.......... 그렇다 보니 주변인들에게 기가 약하면 약했지 세 보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방송 업계에 발 담그기 전 까지는 P. 111
<작가라는 제2의 자아 만들기>
유재석이 '유아호'나 '유산슬'처럼 부캐를 갖고 있듯이 나도 20년 전부터 나의 부캐를 가지고 있었다. 착하게 살면 억울하니 나는 조금 더 센 자아를 만들었다. 그녀는 나보다 할 말도 잘하고 똑 부러진다. 그녀로 변신하면 어눌한 말투 대신 딱딱하지만 똑 부러진 말투로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다. 그녀는 준비성이 아주 철저한 편이라서 만나려면 시간이 많이 든다.
20대 중반 방송작가를 하면서 나에게는 3개의 자아가 존재했다. '유순한 김세정(꾸질꾸질한 김희동), 똘똘한 김세수, 똑똑한 김 작가'가 그것이었다. 싸움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싸우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집요하게 캐묻지도 않는다. 적당히 친절하고 생각보다 편안한 사람이었다. 유순한 김세정과 똘똘한 김세수는 대부분의 생활 속에서 실수도 하고, 모험도 하고 함께 부딪히지만 '김 작가'는 달랐다.
일터에 나오면 나는 나의 허당기를 싹 빼버렸다. 방송작가는 허술해서는 안되었다. 정확한 팩트와 논리와 명확성이 있어야 했다. 거기에 재미와 교훈까지 요구되었다.
어느 날은 변호사와 어느 날은 세무사와 어느 날은 의사 선생님과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원고를 쓸 때는 내가 마치 의사나 변호사 아나운서에 빙의해서 원고를 썼다. 그들의 말투와 그들의 전문용어를 배웠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사전에 연락을 해서 제대로 알아야지만 글을 쓸 수 있었다. 두리뭉실하고 대충 쓰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나는 약 2년간 머물었던 방송에서 맛집 방송, 여행 방송, 지역 시장 소개, 휴먼다큐, 해외 홍보 기획물, 세법, 법률, 의학, 문화예술 등 닥치는 대로 배웠다. 그러다 보니 여러 방면에 아주 폭넓고 얕은 지식의 바다가 형성되었다.
<이런 가족은 사양합니다.>
햄버거 세터 사은품으로 받은 유리컵보다 더 깨지기 쉬운 것이 '우리 팀', '우리 사이'라는 사실을 매 년, 매 분기마다 느꼈기에.
진정한 의미의 팀이라면 성공의 과실도, 실패의 쓴맛도 다 같이 나눠야 한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한 팀이었다가 오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지는 말아야 한다. P.139
나중에 알았지만 프로그램 PD가 바뀌면 작가가 '물갈이'되는 건 흔한 일이었다. PD가 자신과 결이 맞는 작가를 데려오거나, 새로 모집 공고를 내기도 한다.
내가 메인작가를 달지 않고 그만두었기 때문에 나는 억울한 퇴사는 당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억울한 퇴사를 당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본 적은 있다. 대부분 프로그램이 문제가 되는 경우 해당 프로그램이 사라지거나 개편이 된다. 개편이 되면 피디들은 남고 작가들은 교체가 된다. 내가 일했던 외주제작사의 경우 작가 출신의 대표가 있었던 곳이 한 곳 있었던 반면, 나머지는 대부분이 피디 출신이 만든 외주제작사였다. 외주제작사에서는 피디들이 정직원이고, 작가들은 프리랜서다. 그래서 피디는 남기고 작가만 교체되는 경우가 꽤 있었다.
나를 남겨두고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메인작가님은 갓 입봉 한 나에게 '경력이 있어야 다른 곳도 갈 수 있다며 무조건 버티라.'라고 조언했다. 나는 작가님의 조언대로 다른 곳으로 이직할 수 있는 경력만큼 버텼다.
방송을 만드는 두 가지 큰 틀에는 영상과 대본이 있다. 영상을 담당하는 피디는 아빠와 대본을 담당하는 작가는 엄마와 비슷하다. 피디들이 촬영 나가기 전에 모든 것들을 작가들이 미리 다 섭외하고 준비해야 한다. 물론 유능한 피디들은 작가가 만들어 놓은 촬영 구성에 +@를 촬영해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능력 있는 피디를 만나는 건 개인 작가의 복이다.
나는 입봉의 운도 좋았지만 피디의 운도 좋은 편이었다. 아마 경력이 짧았던 것에 비해 빨리 입봉하고 많은 작업량을 소화해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매번 열심히 일했고,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평판은 나쁘지 않았고 작가들은 물론 피디들과 사이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이좋은 피디들도 문제가 생기면 남이 된다는 불편한 진실, 어제는 같이 감자탕에 소주를 먹었던 동료가 오늘은 적대적인 그런 일들이 방송가에서는 종종 생긴다. 작가 경력이 10년이 넘은 메인들이 그렇게 아무런 힘없이 교체대는 것을 보고 나는 방송가에 오래 있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사람을 부속품 취급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초창기부터 가지고 있던 반발심이었다. 나는 방송을 위한 구성품이 아닌데, 방송을 위해서 존재하고 쉽게 다른 이로 대체 가능한 그냥 '작가'였다. 나는 한 번도 내쳐진 적 없었지만, 작가를 그런 식으로 내치는 곳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아 대부분 스스로 나왔다.
그때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나의 프로그램이 개편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뛸 듯이 기뻤다. 간혹 다음 프로그램을 같이 가자는 동료들에게 건강상의 이유로 자주 '탈출'을 시도했다.
나는 미친 듯 일했고, 한동안 많이 쉬었다. 쉬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방송을 할 때, 나는 항상 긴장되어 있었고,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항상 '대기 모드'로 방송을 위해 대기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방송이 너무 힘들어 도망가고 싶을 때는 나는 내 몸을 혹사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나는 살아있다. 죽지 않고 도망쳐서 살아 나왔으니 된 거다. 내가 멘털이 조금만 더 약했더라면 나는 달려오는 지하철 5호선에선 운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P.184
당신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우리는 출판사와 학교, 회사, 온갖 곳을 수소문해서 당신에게 닿을 방법을 찾습니다. 어떨 때면 10분 만에 통화가 성사되지만 또 어떨 때는 네다섯 시간을 전전긍긍하기도 하죠. 그래도 우리는 쉬지 않습니다. 소속사에 전화를 돌리고 보도 자료를 다시 들추고 포털 사이트를 해집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방송의 시작은 섭외니까요. 누군가는 우릴 보고 말하더군요. 하늘 아래 너희가 찾지 못하는 전화번호는 없다고
아주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해둔 나의 블로그의 대문 이름이 책에서 나와서 깜짝 놀랐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어느 날 그 문장 하나가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것이 나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어디에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사람이라는 것.
방송에서는 '나'가 없다. 개인은 없다. 개인의 삶이 우선이 아니라 '방송'이 우선이다.
'하늘 아래 너희가 찾지 못하는 전화번호는 없다고'
방송가에서 내가 15년 전에 들었던 말이었다. 나는 방송작가가 아니라 '스토커'였다. 정말 온갖 정보를 다 해 집어 연락처를 알아냈다. 나는 나의 적성이 방송작가가 아니라 '흥신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시절에 늘 했었다.
대한민국은 사이좋은 세상. 한 다리 건너서 두 다리는 건너면 알 수 있는 세상. 그 사람의 소속만 알면 인맥과 지인을 통해서 출판사와 잡지사와 기자를 통해서 홍보팀을 통해서 어디를 통해서든 그 사람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이사를 하면서 작가노트 5권을 버렸다. 연락처가 빼곡하게 적혀서 태워버리라고 따로 빼주었다. 음식점에 가도, 전광판을 봐도 우리는 전화번호를 본다. 그리고 적어둔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모르니까 일단 적어둔다.
직가를 그만두면서 몇 상자의 명함들을 홀가분하게 버렸다. 아마 내가 방송국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다면 그 명함 상자는 2배 아니 10배는 늘어나 있었겠지만 이제는 괜찮다. 나는 그들을 섭외할 필요가 없는 전직작가니까. 1000명이 넘던 전화번호도 대부분 지워버렸다. 내가 그들에게 급하게 연락할 일은 없을 때니까.
방송을 떠나니 어느 한 편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내가 떠난 10년 뒤에도 여전하다는 책의 내용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