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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씨앗 Oct 14. 2021

[부부] 아내의 고백

결혼을 망설였던 여자의 이유

드라마 <연애의 발견> 속 '한여름' 대사



"여보, 아까 낮에 드라마를 보는데 거기 주인공 여자가 이야기한 게 있거든? 30대 여잔데 먹고 사느라 벌어놓은 돈도 없고, 빚만 많고,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좋다고 고백을 못 한대. 돈이 없어서 결혼을 할 수가 없는 거지. 근데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는 건 자존심 상하니깐 결혼이 싫다고 했대."


 낮에 본 드라마 이야기를 신나게 하는 아내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반짝인다. 방금까지는 남편과 주식 이야기를 하던 아내였다. 하지만 어떤 단어에 꽂혔는지 아내는 금세 '드라마'이야기에 푹 빠졌다.

남편은 그저 눈빛을 반짝이며,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근데, 그거 나랑 똑같아. 나도 예전에 그런 생각했었거든. 좋아하는 남자가 생겨도 돈이 없어서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모아놓은 돈도 없고, 집에선 안 도와줄 거고, 없다고 말하기는 자존심 상하고..."


 아내의 눈동자가 다시 반짝인다. 그리고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우리 결혼할 때 여보가 침대는 시몬스였으면 좋겠고, TV는 무조건 가장 커야 한다고 했잖아."


남편은 아내의 이야기에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뽀로퉁하게 모았다.


"결국은 시몬스 안 사줬잖아."


 "안 사준 게 아니라 못 사줬지. 그래도 침대는 그 매장에 여보 때문에 제일 좋은 걸로 샀어. 시몬스보다는 쌌지만... 내가 돈 모아놓은 게 있어야지. 돈은 없는데 여보는 계속 시몬스 시몬스 하는데 시몬스 침대가 좀 비싸야지. 매트만 300 가까이 되고, 침대틀까지 하면 500만 원은 잡아야 했어. 집구석은 코딱지만 한 데, 여보는 TV는 크면 클수록 좋다며 제일 큰 걸로 사자고 했잖아."


 "근데 난 TV랑 침대밖에 말 안 했는데?"


 "살림이 TV랑 침대만 있어? 냉장고도 사고, 세탁기도 사야 할 거 아냐. 장롱도 사고... 여보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했지만. 내가 손빨래할 거야? 냉장고 없이 어떻게 살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여자들은 냉장고나 세탁기 좋은 게 더 좋거든."


 신나게 이야기하느라 목이 아플 아내를 위해 남편은 재스민 차를 타서 아내의 앞에 밀어놓는다.


2011년, 티타임



"딱. 이거지. 어떻게 내가 목마를 줄 알고 준비했어?"

 "말 많이 하길래. 계속해봐. 그래서?"


"그때 내가 여보한테 돈이 없다고 한 말 기억나? 돈이 없어서 그런다고 얘기했던 거."


"그랬나? 잘 기억이..."


"나 그때 여보랑 헤어질 각오하고 얘기한 거야.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목구멍으로 안 나오더라고. 근데 그때는 방법이 없는 거야. 돈은 없는데 자꾸 비싼 것만 얘기하니깐.... 그냥 빈털터리인 거 여보한테 오픈하고 헤어질 거면 헤어지자 그렇게 생각했지. 근데 여보 그때 기억나? 여보가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여보가 나한테 200만 원인가? 입금해주면서 지금은 가진 게 그것밖에 없다고 신혼살림 살 때 모자란 거 보태서 사라고 줬었다? 그거 완전 감동이었어."


"내가 그랬다고? 아.. 맞다. 그랬던 거 같기도 해. 근데 그렇게 안 줬을 걸..."


 남편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돈을 가슴 주머니에 넣는 시늉을 했다.


 "내가 그렇게 줬겠어? 이렇게 가슴에 탁 꽂아줬겠지. 쓸 거면 써~ 하면서 말이야."


 아내는 남편의 장난에 눈을 흘기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어쨌든 여보, 그때 너무 고마웠어. 아마 나 여보 아니었으면 결혼 못했을지도 몰라. 진짜 돈이 없어서"


"응 그러니까 앞으로 더 잘해~"


"싫은데~ 안 할 건데? 난 앞으로도 이대로 쭈욱 내 맘대로 살 건데~"


 달달한 분위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퇴근 후 아내가 주문한 족발을 포장해서 들고 온 남편은 아내의 칭찬에 어깨가 한층 으쓱했다.



 

 여자는 생각했다. 그때 만약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결혼 같은 건 싫어.' '우리 시간을 좀 갖자.' '잘 모르겠어.' 등 헛소리를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어쨌든 여자는 정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돈 없어' 소리를 누르고 누르고 마구 짓눌렀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에게 그 거 말고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 상태'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사랑하고 좋아하고 함께하고 싶지만 결혼식 혹은 결혼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없었다. 딱 그것뿐인데 그 말하기가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이 있다. 그녀가 딱 그랬다. 

 여자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사랑도 내려놓을 생각으로 진심을 얘기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사람'을 '사랑'을 너무 우습게 생각했었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것이 '결혼'이지,
돈이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 '결혼'은 아니었다.




 남자의 로망은 TV와 침대뿐인가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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