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예방주사 맞는 날...
금요일 아침, 학교 가는 첫째에게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오늘 학교 끝나고 2시에 바로 태권도 가야 해. 2시 전까지는 자유롭게 놀아도 되고 그 대신 태권도 끝나면 바로 독감주사 맞으러 가야 해."
"주사 안 맞으면 안 돼요?"
'주사'라는 단어에 첫째 딸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엄마, 주사는 어디에 맞아요?"
"주사를 어디에 맞긴, 팔에 맞지."
"아..."
"주사 맞기 싫지? 무섭지. 무서울 거야. 엄마도 어릴 때 주사 맞는 거 엄청 싫어했어. 그래서 그 마음은 알아. 그래도 어떻게 해. 맞아야 하니깐 그냥 빨리 맞고 오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예방주사 맞는 날'이 가장 싫었다. 주사를 무서워하는 나는 예방주사 맞는 날이 거의 지구 종말의 날처럼 느껴졌었다. 지금이야 각 가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맞지만 내가 어릴 때는 반으로 보건소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차례대로 줄을 서서 맞았던 기억이 있다.
"아파? 아파? 많이 아파?"
맞은 아이의 찡그린 표정을 보며 나는 앵무새처럼 묻고 있었다.
걱정이 많았던 나는 예방주사 맞기 일주일 전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방주사는 얼마나 아플까?'
멀쩡한 팔뚝을 꼬집고, 뽀족한 샤프로 찔러보기도 하고, 예상할 수 없는 주사 바늘의 고통을 미리 체험(?) 해보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었다.
막상 맞고 나면 생각보다 별거 아닌데... 주사 맞기 전이 항상 지옥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쯤인가? 주사를 맞기 싫어서 죽을 생각을 할 정도로 나에게 주사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안 아프려고 맞는 주사인데 주사 스트레스로 나는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우울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가 물었다.
"왜 이렇게 우울해?"
"아, 내일 주사 맞는 거 때문에... 우리 엄마는 학교에서 나오는 주사는 무조건 맞으라고 하시거든."
"뭐가 걱정이야? 신청서 종이를 안 보여주면 되지. 종이 안 주면 엄마들은 몰라. 나는 주사 하나도 안 맞아."
그 뒤로 몇 번의 주사 용지를 빼먹으려 시도 했지만 자녀가 셋인 우리 집에선 내가 예방주사 신청서를 전달하지 않아도 엄마는 예방주사 유무를 다 알고 계셨다.
맞아야 하는 기본 접종이 끝나고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스스로 예방주사 프리패스를 시행했다.
"엄마, 나 주사 안 맞을게요."
"왜. 맞아야지."
"난 독감은커녕, 감기 한 번 안 걸렸잖아."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에게 예방주사는 맞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서야 나는 주사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내가 다시 독감주사를 맞기 시작한 것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였다.
독감 예방주사를 꼭 맞아야 하느냐는 내 물음에 간호사는 대답했다.
"임산부가 맞으면 태아에게 백신 효과가 남아있다고 하니까 맞으면 좋겠죠."
비록 티끌만큼일지라도 내 아이에게 내가 맞은 백신이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소리를 들으니 차마 안 맞겠다는 소리가 안 나왔다.
아이의 출생 후부터 아이와 함께 10년 내내 꼬박꼬박 독감 예방주사를 맞고 있다.
최근 코로나 백신 2방과 독감 예방주사를 거뜬하게 맞고 온 나를 보며 스스로 이제 제법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듯 주사 겁쟁이 엄마에게 태어난 딸들에게 주사가 무섭지 않으니 맞으라고 강요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무섭지. 아프지. 얼마나 싫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의 마음이 그러하듯이 '맞아야 아이가 덜 아프고 덜 고생하니까....' 맞히는 거다.
아이의 표정을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주사 생각만 할 것 같았다.
"오늘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학교부터 가자. 학교 갔다 와서 맞을지 말지 생각하자."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일단 등교를 시켰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딸아이는 '주사'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OO이도 독감 예방주사 벌써 맞았대요."
"응, 아마 대부분 다 맞았을 거야. 우리가 좀 늦은 편이야."
주사에 대해 고민하는 첫째에게 '딜'을 한다.
"태권도 갔다 와서 주사 맞을까? 아니면 독감 주사 맞으니까 태권도 하루 빠질까?"
첫째는 고민했다.
오늘은 독감 주사 맞는 날이니, 매일 가는 학원 하루 정도는 빼주는 게 양심적이지 않을까?
"그래요. 오늘 주사 맞고, 태권도는 하루 쉴게요."
"그래... 주사 맞으러 가자."
"엄마, 대신 내일 게임시켜주셔야 해요."
"물론이지. 얼른 가자."
유치원 하원을 끝낸 둘째를 보자마자 첫째는 다시 주사 얘기를 꺼냈다.
"@@아, 오늘 우리 독감 예방주사 맞으러 가."
둘째는 처음 듣는 소리에 당황한다. 그리고 바로 맞지 않겠노라 어깃장을 놓는다.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간다.
10살이 된 첫째는 제법 의젓해졌다.
"나 예전에 주사 맞아봤어. 예전에는 안 울었어."
"언니 나는 주사 맞기 싫어."
둘은 열심히 주사에 대해 떠들다가 진료실로 들어갔다.
언니인 첫째가 먼저 앉아 주사를 맞는다.
둘째가 내 품으로 파고들며 매달린다.
"싫어, 나 안 맞을래. 무서워~"
"1000원! 1000원! 포상금 1000원에 내일 게임시켜줄게"
"그래도 무서워"
"그럼 내일 게임 안 할 거야? 언니는 게임한다고 주사 맞았는데."
"나도 할래."
"그럼, 주사 맞을까?"
싫다는 둘째를 자연스레 의자로 옮겨 앉혔다.
"현금 천 원 받을래? 약국에서 젤리 사줄까? 일단 맞자. 의사 선생님 보지 말고 엄마 보고 있어."
간호사 선생님이 불안한 듯 둘째를 바라보셨다
"어머니께서 아이를 앉고 앉으셔야...."
"괜찮아요. 그냥 맞을게요"
주사는 어릴 때부터 첫째보다 둘째가 더 잘 맞았다. 둘째가 자리에 앉자 첫째가 둘째 앞에 서서 둘째의 시선을 교란시켰다. 엄마인 나도 자꾸 말을 걸어 정신을 딴 데로 쏠리게 했다.
둘째가 딴생각을 할 때 의사 선생님이 있는 힘껏 '찰싹, 찰싹' 소리가 나게 둘째의 어깨를 두 번 때렸다.
'아뿔싸.. 아프겠다.'
주사도 아플 텐데... 멀쩡한 팔을 두 대나 때리셨다.
"아야, 아야"
아이가 맞은 팔에 집중하는 사이, 주사액이 들어있는 바늘이 둘째에 어깨에 쏙 들어갔다가 나왔다.
"자, 끝났다. 금방이지?"
의사 선생님이 무뚝뚝하게 얘기했다.
"엄마 팔에 당근을 심은 느낌이야."
듣고 있던 간호사가 아이의 생각이 기발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료실을 나오면서도 둘째가 구시렁거렸다.
"엄마 주사보다 선생님이 때린 게 더 아팠어"
아이는 주사 맞은 기억보다 선생님한테 팔을 두 대 맞은 게 아팠다는 기억만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팔에 당근을 심었다는 말만 기억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자매의 당근 주사설(?)은 끝나지 않았다
"언니, 주사 아팠어?"
"조금?"
"나도 살짝. 근데 누가 내 팔에 당근을 심은 거야. 내 팔이 땅도 아닌데..."
둘째는 선생님이 주사 맞기 전에 두 번 때린 것이 마치 당근이 팔에 박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와, 어떻게 하면 이런 생각을 하지?'
'독감주사의 아픔' = '팔에 당근 심는 느낌'
7살 아이의 생각이 참 귀엽다.
포상 게임타임 vs 당근(?)이 지나간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