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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인생의 숙제 - 글. 그림 백원달

인생의 숙제를 마치고 다시 꺼내보는 옛 일기장

by 연두씨앗 김세정


인생의 숙제의 한장면 따라그리기



1화 - 좋아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때때로 생각한다. 하루는 24시간인데 나만을 위한 시간은 고작 4시간 남짓.

때때로 생각한다. 나는 시간이 남들에 비해 많은 편인데도 나는 나를 위한 도대체 얼마의 시간을 쓰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소중한 시간이 넋 놓고 있는 사이에 무의미하게 그리고 아주 빠르게 흘러가 버렸다.

읽지도 않으면서 하트를 누르는 유나처럼, 결제하지도 못하는 장바구니의 쇼핑 목록만 늘어난다. 다 살 걸도 아니면서, 다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사도 사도 물욕은 끝이 없다.


참고 살아야 한다길래 참고 살았더니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잊어버렸어. p22

비단 나뿐일까? 아마 대부분의 세상의 많은 부모,

세상의 많은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이 아닐까?

'좋아한다고 다 할 순 없다는 말'

이 말은 누군가를 위한 핑계일까? 누군가를 위한 위로일까?



2화 - 나도 모르는 내 미래를 아는 사람들

- 스물세 살 때 만난 남자 친구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서른세 살에 남자 친구 부모님을 만나는 건 1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야.


스물세 살의 나와 서른세 살의 나는 다르다. 스물세 살의 역할과 서른세 살의 역할은 다르다. 문득 명절에 엄마를 도와주다가 귀찮으면 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보거나 딴짓을 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명절의 노동은 엄마의 반협박과 힘든 엄마를 돕기 위한 나의 자의(?)에 의한 것이라면 결혼 후 명절 준비는 자의가 아니라 당연한(?) 역할과 도리가 되었다. 결혼을 하고 명절을 보내며, 문득 어린 시절 엄마가 부엌에 들어오지 말고, 차라리 밖에 나가서 놀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땐 마냥 어린 우리가 귀찮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었다. 명절에 어린 딸들이 음식을 만드는 걸 구경하겠다거나 만들겠다고 나서면 나는 인상을 쓰고, 밖으로 내쫓는다. 나는 내 딸들이 나처럼 명절에 음식을 만들고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릴 때는 우리가 크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도 제사 안 지내던 집은 지금도 제사를 안 지내고, 그때나 지금이나 제사를 지내고 예의범절, 도덕을 따지는 집은 지금도 그렇게 지낸다. 시대가 아니라 집집마다 다르다.


3화 외로운 자유부인


- 나 사실은 몇 달 만에 자유 부인이야. 너무 신나서 친구들한테 연락했는데 아무도 시간이 안 되더라. p51


내 생활은 철창 안의 다람쥐처럼 늘 똑같은 쳇바퀴인걸. p56


원래도 집순이였던 나는 결혼과 육아 후에 완전에 붙박이가 되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날엔 나는 계획을 잡지 않는다. 육아를 하면서 정말 '자유부인'이었던 날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내가 자유를 누리는 동안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늘 무거웠다. 아이들이 제법 큰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내 자유를 반납한 채 살아간다. 일찍 육아를 해서 아이를 키운 나와 이제 육아를 하는 친구들은 시간이 맞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남편이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었다. 하루 동안 자유시간을 줄 테니 놀러 가던지, 친구를 만나라고 했었다. 그런 좋은 기회를 나는 그냥 놓쳐버렸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특별히 만날 사람도 없었다. '그냥 나 혼자 있을 테니까 여보가 아이들 데리고 나갔다 오면 안 될까?'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을까? 왜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은 걸까?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 걸까? 물론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가고 싶은 데도 있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뭔가 마음속에 내키지 않은 불편함이 있었다. 아무도 나를 묶어두지 않았는데, 스스로 묶여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4화 어린 날의 나에게 위로받을 수 있다면


- 어리고 여렸던 나를 일기장에 버려둔 채 현재의 나는 불 꺼진 밤을 걸었다. p74

어릴 적 나는 일기 쓰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도 기쁜 일과 슬픈 일들이 생기면 일기장에 적곤 했다. 말은 새어나가기 좋고, 비밀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비밀이었다. 그래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일기장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일기장의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겨두었다. 어느 날은 두근대는 설레는 마음을 적었고, 어떤 날은 가슴 아프고 슬픈 일들을 적었다. 잊지 않겠다며 일기장에 빼곡하게 기록해놨던 나의 기억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잊지 않겠다고 하고는 잊어버렸다. 하긴 뭐 20~30년도 지난 일들을 뭐 어쩌겠는가.



5화 흘러가는 시간, 쌓여있는 시간


- 문득 처음 회사 생활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밤마다 울었는데, 하지만 언젠가부터 눈물이 전혀 나지 않는다. 어쩌면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려버렸는지도 몰라. p81


어릴 때 나는 울보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금만 서러워도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나는 울보인 내가 싫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울지 않는 연습을 했다. 울보가 울지 않는 연습을 한다고 눈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남몰래 숨어서 울고, 가끔은 남들이 보던 말던 홍수처럼 범람해버리곤 했다. 참 많이 울어서 그런가. 사실 요즘은 눈물이 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만큼 행복하다는 것일까? 눈물 나는 일이 없다는 건 참 다행이다. 그런데, 그만큼 감정이 메말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말랑말랑했던 감정들이 푸석푸석해지는 느낌이랄까



6화 오늘 죽을 수 있다는 걸 깨닫다

- 깨달았다. 인간의 수명이 150살로 늘어날지언정 나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걸. p115
진짜 운 나쁘면 말이야, 미래고 뭐고 오늘 당장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유언장을 써놓겠다는 다짐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피곤한 얼굴로 퇴근한 남편이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막말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고, 그러면 이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버리면 너무 인생이 허무하잖아. 그래서 나 결심했어. 이제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야. 여행도 다니고 해 보고 싶은 것도 다 해볼 거야.'

남편의 말에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일만 하다가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남편은 그 말을 꺼내고는 그동안 쌓아놨던 여행 일정을 차곡차곡 진행시켰다. 그리고 건강하게 살겠다며 운동을 하고, 미래를 위해서 책을 읽었다. 스스로를 위해 계속 발전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거기까지였다. 남편은 변했지만, 나는 그대로였다.

나는 내가 생각보다 빨리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주 오만했던 것 같다. 아이들 일정과 남편의 계획, 가정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마치고 미뤄뒀던 건강검진을 갔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가슴에 혹이 그 사이에 많이 자라 있었다.

가족력도 있으면서 오만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직검사를 해보자는 말에 나는 정신이 아득했다. 만약에 암이라도 지금 발견하면 나는 살겠지. 살 수는 있겠지. 그런데, 지금 암이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물론 암이 나이를 보고 오는 것도, 사람을 보고 오는 것도 아니지만... 열심히 살지도 않았지만 열심히 해본 것도 없어서 억울했다. 물론 단순 양성종양이니 간단한 수술로 제거하면 끝날 수도 있다. 늘 건강했기에 그런 오만함이 있었다. 행복에 겨워 그동안 너무 오만했던 것일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통사고로 오늘 죽을 수도 있고, 아주 늙어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함부로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자제해야겠다.

"엄마,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죽어야 해. 그래야 천국에 가서도 함께 여행을 다니지. 그러니깐 엄마랑 아빠도 우리 죽을 때까지 죽으면 안 돼."

8살 아이가 무심코 뱉은 말에 정신이 아득하다. 8살 아이가 죽을 때까지 오래 살라고? 맙소사!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 빠른 이별은 싫다. 오늘 죽을 수도 있으니 이제 좀 편하게 살아보면 안 될까? 하고 싶은 말도 좀 하고 살면 안 될까? 사고 싶은 것도 좀 사고 살면 안 될까? 물론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이제 39살이니깐,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깐 나도 조금은 내 맘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7화 편안함과 무관심의 차이에 관하여


- 내 말 듣고 있어? 편한 것과 무관심한 건 다른 거야. p132

나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친구 사이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연인 사이에서도 모나지 않은 편이었다. 누구나 나를 편안하게 여겼고, 그래서 가끔은 그 당연한듯한 '무관심'이 싫었다.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나였지만, 나도 때론 '관심'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했던 어떤 남자는 내가 편해졌다며 나를 떠났다. 연인 사이가 오래되면 편안해진 게 당연한 게 아니냐며 나는 분노했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만난 사람은 나를 너무 편안해하는 것 같아서 이별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편안함을 당연시했고, 거기에서 오는 무관심에 마음이 상했던 것 같다. 세상에 당연한 사람은 없다. 당연할수록 소중할수록 아끼고 더 보듬어줘야 한다.



8화 세상 맛있는 것들을 똥으로 바꾸는 쓸모없는 기계


- 열정적으로 뭔가를 해본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더라. 과거에는 시 쓰기 좋아하는 아이였는지 몰라도 지금의 나는 세상의 모든 맛있는 것들을 똥으로 바꾸는 쓸모없는 기계가 되어버렸는지도 몰라. p 145


세상 맛있는 것들을 똥으로 바꾸는 쓸모없는 기계가 뭔지 사실 궁금했었다. 그런데 그게 나라는 사실이 절망스러우면서도 그 쉬운 똥으로 바꾸는 것도 힘들어하는 몸뚱이를 가진 것에 조금 속상해졌다. 누군가에게는 그 쓸모없는 기계라 불리는 건강한 몸뚱이가 축복일 수도 있다.


9화 관찰, 발견, 이해의 3단계


- 돌이켜보면 내가 살던 모든 시간 속에 그녀가 존재했다. 교실에도 있었고, 소개팅 자리에도 있었으며, 아르바이트하던 피시방에도 있었고, 전에 다니던 직장에도 있었다. 모습만 다를 뿐 모두 홍진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p160


유나의 삶뿐 아니라 내 삶에도 '홍 팀장'은 존재했다. 때론 그녀를 피해 도망가기도 하고, 가끔은 그녀에게 맞짱을 떠보려 시도도 해보았으나 결론은 너덜너덜하게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오히려 회사에서 만나는 그녀는 상황이 나은 것일 수도 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끊어낼 수 없는 곳에 있는 '홍진숙'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 삶에 '홍진숙'을 찾아봐야겠다. 분명 있는데, 그것도 잠깐 사이 잊어버렸다. 아마 내 일기장 어딘가에 '홍진숙'에 대한 기록이 있을 듯하다.


10화 나이 드는 건 내 잘못이 아닌데


"보아하니 동반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애 낳는 기계가 필요하신가 보네요. 엔지니어라고 하셨으니 난자라도 불법 기증받아서 애 낳는 기계라도 만드시든지. 당신 같은 놈한테 난자를 기증할 멍청이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끝마다 비싸다고 생색내시는 게 하도 꼴사나워서 제가 계산하고 갑니다." p186


열심히 일하느라 젊음을 다 바친 홍 팀장. 바쁜 와중에도 자기 관리하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서 이뤄낸 그녀의 삶이었다. 그 잘난 그녀도 '나이 든 여자'라서 애 낳을 수 있냐는 말에 발끈해버린다. 남에게 상처 주는 게 익숙한 그녀는 자신의 상처에 보란 듯이 받아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홍 팀장의 독설이, 홍 팀장의 자신만만함이 시원하면서도 그녀의 가슴에 남았을 상처는 왠지 모르게 시큰하게 만들었다.


11화 나를 알아주는 사람


- 작품은 엉덩이에서 나온다. 괴로워도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그림 그리고 수정하고 고민하다 보면... 뮤즈의 옷깃이 스칠 때가 있다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누굴까? 그 사람은 진짜 나를 알고 있을까? 아니 그런 것도 필요 없다. 그냥 있는 나 그대로는 보고 받아들여주는 그런 사람으로도 족하다.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던 어린 시절에 우리는 '뮤즈'에 대해서 떠들곤 했었다. '그분'을 만나면 뭔가 '대작', '걸작'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가끔 정말 '뮤즈'를 만난 듯 몇 개월 사이에 엄청난 작품을 써낸 친구들을 본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뮤즈'는 아니지만 '그분'이 가끔 오실 때가 있었다. 그분은 엄청난 속도로 밀린 숙제를 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엉덩이를 부치고 단 몇일만에 소설이든 드라마든 시든 끝내버렸다. 아쉽게도 그분의 실력은 '뮤즈'는 아니었다. 그저 숙제 검사만 면했던 것 같다. 이제는 그 마저도 만나지 못하니... 이제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면 '뮤즈'를 만나게 될까? 그냥 그런 생각에 잠시 웃음이 났다.


12화 예전에 놓아버린 것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 응원이 더 큰 상처가 되는 건 왜 일까... p215
- 미경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어쩌면... 예전에 놓아버린 것을 다시 잡을 수 있을까. p228


어른들이 말했다. 꿈은 결혼한 뒤에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운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그러는 사이에 정말 내가 내 꿈을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불행 중 다행은 내 꿈에 '정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정년 없음'에 내가 너무 안이해져 버린 느낌이었다. 글을 쓰겠다고 동화를 써놓은 지 3년이 넘어간다. 올해에는 꼭 책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나는 다듬기만 할 뿐 도통 진전이 없다.

이제 수고했다고, 내 꿈을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는데.... 정말 머리가 가슴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남들도 다 이렇게 어려운 데 시작한 거겠지. 나만 힘든 건 아닌데... 괜스레 나약한 자신이 싫을 때가 있다. 가끔은 응원이 힘들 때가 있다. '잘 될 거야.'라는 응원의 말보다 '잘 되지 않는 현실'을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을 때는 응원이 버거울 때도 있다.



13화 떠밀리듯 살아지는 삶과의 대화


- 시간이 거대한 강물이라면 어떤 이는 자신의 배를 만들어 스스로 노를 젓지만 나는 그저 시간의 물결에 떠밀려간 느낌이다.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노를 저은 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은 내 선택이었다. 그 선택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됐다. 파도가 무서워 노를 젓지 않았다한들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찌 됐든 시간의 강물을 거스르지 않고 아직 잘 살아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결과이니까....



14화 착한 딸

- 엄마가 나빴어. 너의 꿈을 지원해줄 능력이 없었기에. 엄마는 네가 글 같은 거 안 쓰고 남들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p265


유나처럼 착한 딸은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돌이켜보면 그래도 '나쁘지 않은 딸'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알게 모르게 스스로 노력했다. 물론 엄마는 전혀 알지도 못하시만 말이다. 어릴 적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당시에 미술은 돈이 많이 드는 학업이었다. 자식이 셋이나 되는 우리 집에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미술을 전공할 정도의 내 실력이 좋았다면 엄마의 마음이 조금 달랐을까? 어찌 됐든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재능'이었던 나의 미술적 재능은 그냥 날아가버렸다. 나는 그 미술적 재능을 글쓰기로 바꾸기로 마음먹었고 글을 썼다. 그러나 나의 글쓰기 재능도 '남들 정도 혹은 조금 괜찮은 정도'에 그쳤다.

어릴 때부터 끈기가 부족했던 나는 뭐든지 끈기 있게 배우는 걸 잘 못했다. 제법 눈치도 있고 센스도 있고 손재주도 있는 편이라 어느 정도 실력까지는 가더라도 끝까지 노력하지 않아 평범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나도 '재능'이나 '소질'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하다가 어린 시절 흘려들었던 '미술에 대한 재능'이 생각났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림은 제법 그리는 데 색칠이 늘 엉망이라서 망쳤다. 미술학원 한 번 가보지 않았지만 나의 모든 미술 점수는 상위권이었다. 혹시라도 내 딸이 미술에 재능이 있으면 밀어줘야 할까? 나 혼자 생각하다가 웃고 만다. 적어도 돈 때문에 재능이나 소질을 포기하라고 하고 싶지 않다. 엄마가 된 소녀는 딸에게 말한다.

"네가 정 원하면 한 번 되는 대까지 밀어주겠다. 정말 원하는 게 있으면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얘기해 줘."

하지만 아직 어린 딸에게 재능이고 소질이고 진로는 너무 먼 이야기이다. 그러면서도 아직 어린 딸이 혹시라도 '미술이나 음악이나 무용'을 하고 싶다고 할까 봐 무섭다. 그때의 우리 엄마의 마음도 그랬겠지.

나는 착한 딸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보니 글쎄다. 미술은 엄마가 지원해주지 않아서 포기한 게 아니라 사실은 그냥 내가 어려워서 포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냥 핑계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15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야


- 유나는 왜 모를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라 결혼할 때 만난 사람과 한다는 걸.


철민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내 남편과 내가 27살에 만난 건 참 다행한 일이었다. 26살에 만났더라면 어쩌면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 역시 지금의 나와는 헤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연인을 만났고, 연애를 했고, 이별을 했고, 그로 인해 성숙해졌고, 조금씩 달라졌다. 날카로웠던 서로의 톱니들은 전 연인들에 의해 어느 정도 마모되었고, 우리는 적정한 나이에 결혼을 했다. 내 나이 28살, 남편 나이 30살에 결혼을 했다. 남편에겐 조금 이른 결혼일 수도 있었지만, 나의 의견에 맞춰줬다. 나는 28살에 결혼을 하고 싶었고, 남편은 33살에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남편은 28살의 나를 잡기 위해 30살에 결혼을 했다.


16화 군중 속의 고독


- 결혼 전에는 결혼해라~ 결혼해라~ 잔소리에 시달리다가 결혼하니까 애 낳아라~ 애 낳아라~ 잔소리에 또 시달렸는데 드디어 해방이지 뭐. 결혼과 육아는 인생의 숙제니까. p296


인생의 숙제가 결혼과 육아라면, 나는 그 숙제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임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임신과 육아를 성심성의껏 해치웠다. 그리고 그만큼 빨리 고독해졌고, 빨리 늙었다. 친구들은 일찍 결혼해 제법 아이들이 큰 나를 부러워하지만, 나 역시 그들이 부럽다. 누군가는 그 시간에 일을 해서 커리어를 쌓았고, 나는 그 시간에 육아를 해서 아이를 키웠다. 나중에 보면 아이들도 자라 있을 것이고, 나도 언젠가 다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순서의 차이일 수도 있다. 서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고 열망하기도 한다.

또래보다 일찍 육아를 해서 외로웠고, 또래보다 일찍 육아가 끝나서 외롭다. 친구들은 해외여행 가거나 맛집을 찾아다니는 동안, 나는 기저귀 발진 없는 기저귀를 찾아 헤맸고, 새로 생긴 키즈카페를 찾아 헤맸다. 아이에 얽매이지 말고 어느 정도 분리, 독립하라는 말이 있는데... 쉽지가 않다.

경력이 단절된 엄마들에게 결국 살림과 육아, 아이들의 성장이 평가 기준이 된다. 굳이 꼭 평가를 해야 하나? 굳이 꼭 평가를 받아야 하나? 내가 평가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 평가하지 않을 것일까? 나 스스로 나약해서 내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가끔 고민해본다. 그래서 한 발 물러서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다시 부탁한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후진이 없다. 오로지 전진뿐이다. 아이들이 자기 스스로 잘 자라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내가 애걸복걸한다고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것도 아닌데, 엄마 혼자 스트레스받고, 혼자 애쓰는 게 가끔은 허탈하고 웃음이 난다. 하지만 아이들도 크면 지금 내 맘을 알지 않을까? 내가 지금 알고 있듯이, 아이들도 엄마가 왜 밤마다 일찍 자라고 소리를 치고, 숙제는 미리 하라고 했는지, 엄마 말 잘 들어서 손해 볼 거 없다는 소리를 했는지 살아보면 알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엄마 말을 잘 들었는데, 한 편으로는 엄마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했고, 하라는 것도 안 했던 것 같다. 냇가에 엄마 묻어놓고 비올 때마다 엄마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울어대는 청개구리가 되지 말라던 엄마의 말이 무섭다. 청개구리도 크면 엄마가 된다.


17화 행복해 보이기

- 남편이 출근하면 나는 홀로 아이와 남겨진다. 기저귀 갈고 모유 먹이고 아이 씻기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린다 싶으면 벌써 해가 지네... p310
- 예전엔 날씬했는데... 항상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 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SNS를 본다. 다들 행복하구나. 나만 빼고.... 나는 발이 묶여서 집 밖으로 나가기조차 어려운데.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걸까?
- 나 행복한 거 맞지?


아이를 한창 키울 때는 정말 서글펐다. 나이는 나만 먹고, 나만 도태되는 느낌에 할 줄 아는 거 없이 아이를 전담하는 보모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기 전에 '누구 엄마'였다. 아이를 위해 모든 내 생활이 돌아갔다.

"여보, 친구들은 다 해외여행 가고, 경력도 쌓고 그러는데 나만 방구석에 이렇게 있으니 조금 우울해."

"SNS 보지 마. 정신 건강에 안 좋아. SNS엔 다 좋은 것만 올리는 거야. 여보는 안 그래?"

"그런가? 그러고 보니 나도 좋은 것만, 행복한 것만 올렸네."


다 보기엔 행복해 보여도 사람들의 삶들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었던 거 같다. 남들이 보기에도 내 삶은 행복해 보이는 삶이니까. 내가 겪어보지 않은 그들의 삶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남들도 내 삶에 대해 '호강에 겨운 여편네' 취급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그들이 선택과 나의 선택이 달랐던 것이고, 그로 인해 그들의 미래와 나의 미래가 달라진 것이다. 그저 남보다 뒤처지지만 않게 조금만 더 힘을 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러다 내일 죽으면? 인생의 숙제가 무슨 소용이람? 내가 언제까지 살 지 모르니깐... 적어도 내가 사는 동안에는 숙제도 열심히 하고, 후회하지 않게 이것저것 해보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화 가로등 같은 사람


- 어릴 적에는 어른이 되면 누구나 반짝이는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릴 적엔 어른이 되면 '당연히 생길' 뭔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드라마를 너무 열심히 본 것일까? 부모님의 삶에 없지만 드라마에는 있는 삶이 내게도 생길 거라고 막연히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엄마의 삶보다는 조금 편안한 삶이지만 드라마 같은 삶이 모두 있지는 않았다. 당연한 것은 없었다. 반짝이는 별이 되려면 자신을 갈고닦아야 했고, 누구나가 볼 만큼 반짝이려면 그만큼의 깊은 어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야 알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덜 반짝이는 삶을 살기로 했다. 조금 덜 반짝여도 되니깐 어둡지만 말아달라고... 별이 아니어도 가로등이어도, 가로등이 아니어도 그냥 치이는 인간이라도 괜찮다. 그냥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19화 실패란 실패일까


- 실패로 일을 마무리하면 실패로 끝나는 거지만 실패가 앞으로의 삶에 거름이 된다면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언젠가 저는 별로 '실패'를 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오만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 다시 말한다 해도 내 인생에는 '실패'가 별로 없었다. 별로 시도한 적이 많지 않기에 실패가 없거나 적을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실패의 경험담이 있다. 그에 비해 내 삶은 평탄했던 것 같다. 되지 않는 것에는 애초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게 신조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때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상처 입을 게 겁나서 시도조차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예전만큼의 상처가 아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으니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어른이 되었으니까. 조금의 상처는 조금의 실패는 겪어보고 경험해보기로 했다. 실패가 있어야 성공도 있는 법이니까. 하나씩 실패하고 일어서는 법부터 차근차근 배워봐야겠다.


20화 자신의 길 위에서 나를 사랑하기


- 공감하지 않더라도 공감하는 척할 수 있는 세상 속에서 내 글이 사람들 마음에 진심으로 닿았으면 좋겠다.
- 나는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사람과 맞지 않는 것과 결혼이 맞지 않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어. 그러니까 정말 잘 맞는 사람 만나면 아주 그냥 꽉 잡아야 해!

가끔은 공감할 수 없는 것에도 공감하려고 노력할 때가 있었다. 가끔은 그러다 정말 공감이 되어서 수긍해버릴 때도 있고, 가끔은 마음과 뇌가 싸우면서 공감하지 못해 부르르 떨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려고 노력하는데, 사람들도 내 마음에 공감을 해줄까? 해주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는데, 어찌 모두 내 마음과 같을까?

하지만 이 책은 참 내 마음과 닮아있어서 재밌게 읽었던 것 같다.


내 나이는 지금 어디쯤일까?

인생에 고민하고 있는 33살의 박유나, 임신과 출산을 막 끝낸 33살 조수아(유나 친구), 아이들을 키우느라 꿈을 미룬 36살 최미경(유나 직장 선배), 그리고 홍 팀장까지...

당당히 퇴사를 하고 자신의 꿈을 찾은 최미경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실력으로 인정받은 홍 팀장이 되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아하는 게 있다. 하고 싶은 것도 있다. 지지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 이제 노력하고 엉덩이를 붙일 일만 남은 걸까?


"뭐라도 해봐야지."

마흔을 앞두고, 올해 한 가지는 꼭 이루고 싶은데, 안 돼도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시도 자체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장을 덮으며...


책은 두꺼운데, 금방 읽어. 내 얘기 같아.라는 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게 남들 눈에는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부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누구도 자기 인생을 막살고, 망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저, 조금 시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조급해하지 말자.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50년, 100년 후에 죽을지 모르지만

거만하지 말고, 오만하지 말고, 주어진 삶에 감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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