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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당신이 있어 참 좋다 - 최윤석 지음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위로받는 당신을 위한 책

by 연두씨앗 김세정

책을 읽고 좋았던 글귀와 그 글귀로 인해 떠오른 생각들을 적었다.


내 맘대로 키워드 : #드라마 피디는 어떻게 살까 #아이와 아버지의 삶 #인생의 실패에서 일어서기 #소중한 사람들과 관계 맺기 #느려도 바른 길로 #외로움의 끝에서 #2인자라도 괜찮아





<그때 그 아이>

학부모가 된 처지에서 그때 그 애의 부모를 생각해보면 가슴이 무거워진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기 딸이 학교에서 그렇게 따돌림을 당했다면 얼마나 슬플까? 딸이 ‘예쁜 옷 사줘.”했을 때 같이 쇼핑하며 이제는 친구들이 괴롭히지 않겠지 기대했을 그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넌 절대 저 친구 놀리거나 괴롭히면 안 돼. 알겠지?”


학창 시절,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여아 아이에 대한 추억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참 아팠다. 아이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다고 비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때도 따돌림당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아이들 편을 들어주다가 내가 도리어 따돌림을 당해본 실제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아이에게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라고 할 수 없었다. 이야기 속의 반장처럼 그런 아이가 나타나 준다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좋은 반장 같은 친구가 나서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그런 사람이 못되었고, 우리 아이도 그만큼의 강함이 없다. 물론 강하게 키우고는 싶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강해지기를 바라기보다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다. 아빠가 된 작가님의 마음과 엄마가 된 내 마음이 다르지 않기에... 더 공감 가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선생님이든 아이들의 부모님이든 조금 더 관심 있게 아이를 봐줬으면 어땠을까? 지금은 그 어린 날의 상처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바라본다.




<오디션이 끝나고 만난 연극배우>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누군가를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누군가를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올챙이 적 시절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조금만 인기가 올라가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면 갑자기 180도 달라져 버린다. 변한 건 내가 아니고 내 지위 혹은 환경이라고 자위하면서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걸 당연시한다.


살다 보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날 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 자리에 있기에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피디와 오디션을 보는 배우는 어찌 보면 누가 봐도 '갑을'관계이다. 비록 시간과 육체적 피로감은 쌓이겠지만 오디션을 준비하던 간절한 마음을 알아봐 주는 좋은 감독에게는 좋은 배우의 인연도 따라오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내가 앉은자리로 인해 사람들이 '대단하게' 봐줄 때가 있다. 살다 보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게 자리이고 사람과의 관계다. 누군가의 숨겨진 노고를 알아준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아마 오디션을 보는 배우도 그럴 것이다. 비록 오디션장의 배우는 아니었지만 왠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글이었다.



<아빠의 영화>


정말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우리의 그림자가 꼭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모습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뿌뿌! 하고 공룡 소리를 내었다. 형은 그런 날 보더니 질 수 없다는 듯 티라노사우루스 흉내로 날 위협했다. 그렇게 우리 삼부자는 어둑해진 밤거리를 쥐라기 시대로 돌려놓으며 엄마가 차려놓은 저녁을 향해 네 발로 걸어갔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우는 날 업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아빠의 등에는 센서가 있는 것 같았다. 여름에는 시원했고, 겨울에는 따뜻했으니까. 한없이 넓은 등판에 볼을 비비고 아빠의 체온을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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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라는 로망

가끔 드라마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온다. 다른 집 아버지는 정말 저럴까? 우리 아빠도 저런 사람이었으면 참 좋겠다. 나는 드라마 속의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를 보면 항상 부러웠었다. 시골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아이들만 셋이나 만들어두고선 집엔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 뭐 그렇다고 그렇게 나쁘게 사셨던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들 기억 속에 아빠의 자리는 늘 비어있었다. 아빠는 회사에서 늦게 오셨고, 술도 드셨고, 친구들과 모임은 즐기셨지만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없으셨다. 대의, 공적인 것은 챙기셨고, 사적인 가족들은 엄마에게 맡겨둔 채 사셨다.

글을 보면서 그냥 우리 아빠도 아닌데 따뜻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작가님의 아버님은 참 좋으신 분이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따뜻한(?) 분이 되셨구나. 그냥 부러운 마음을 가지다가 문득 돌아보니, 좋은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칭얼대면 육아에 심통이 난 엄마 대신 우는 아이를 아이 띠에 둘러메고 밖으로 나갔던 남편이었다. 독박 육아로 낮에 진을 다 빼고 나면 저녁이 되면 한없이 피곤했었다. 겨우 잠든 새벽에 아이들은 이유도 없이 울어댔고, 나는 달래다가 달래지지 않으면 울면서 같이 짜증을 냈었던 것 같다.

'도대체 더 이상 어떻게 하라고!!!!'

그때 남편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아기띠를 메고 밖으로 나갔다. 씩씩대던 마음을 잠시 추스르고 있으면 1시간에서 1시간 반쯤 슬며시 잠든 아이를 데리고 남편이 집으로 돌아갔다. 나에게는 없는 다정하고 따뜻한 아빠를 나는 남편으로 만났다. 나는 아이들이 눈물 나게 부럽다. 그래서 엄마답지 않게 아이들에게 괜히 심통도 부려본다. 남편은 질투라고 하지만 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부럽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잘해줘서 질투 나는 게 아니라... 그런 아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부러운 거였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본다. 아빠는 질투 날 만큼 괜찮은데, 엄마는? 물론 0점은 아니지만 분명 고득점은 아닌 점수일 것이다. 자상한 아빠 덕에 나는 자상하고 잘 챙겨주는 엄마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역할이 가끔 힘들 때가 있다. 나는 자라면서 느껴보지 않았던 가족 간의 정이 우리 집엔 있다. 받아보지 않은 사랑을 주는 건이 나는 어렵다. 하지만 어딘가 사랑을 듬뿍 받은 듯한 남편은 사랑이 넘친다. 그게 참 부럽다. 어릴 적 받았던 사랑으로 우리 아이들도 나보다 아빠를 닮은 건강하고 밝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열등감 연대기>


생각해보면 그들은 나의 목표이자 동력이었다. 결핍에서 에너지가 생기듯, 나는 열등감이라는 연료를 불태우며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 했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웃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연출을 할 수 있을까?..... 천재들의 생각을 감히 짐작해보려고 했다.

....

세상의 모든 B급 재능들에 말하고 싶다. 당신이 느끼는 질투와 열패감은 훌륭한 땔감이 될 수 있으니 천재가 만들어 놓은 그늘을 잘 활용하자고. 게다가 천재들은 요절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ㅇ뤼는 그런 걱정이 없으니 그러니 얼마나 좋으냐고. 벽에 우리 만의 천연재료로 예쁘게 칠할 때까지 오래오래 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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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나는 천재는 아니니깐 요절은 안 하겠구나' 책을 읽다가 피씩 웃어본다.

나는 열등감이 많았다. 겉은 고요한 대나무 숲인데, 속은 지하의 마그마처럼 펄펄 끓어댔다. 열등감 혹은 분노는 나의 힘이었다. 물론 나는 유순한(?) 편이라 분노나 열등감이 오래가는 편이 아니라 금방 풀리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나는 유독 열등감에 많이 시달렸던 것 같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특기자'였기 때문이었다. '특기자'는 내 인생의 훈장이었면서 지독한 꼬리표였다. 평소에 문학을 즐긴 것도 글을 많이 써본 것도 아닌 내가 우연히 나간 대회에서 얼떨결에 수상을 했고, 시대를 잘 만나서 운이 좋게 대학을 특기자 전형으로 진학했다. 모든 것이 운이 좋게 딱딱 떨어졌다.

대부분의 특기자로 진학한 친구들의 경우 중고등 시기 문학에 대한 관심과 재주가 남달랐다.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대회에 나가서 수상을 한 친구들도 많았었다. 그런 아이들과 대학 가기 전 급하게 문학에 입문한 나 같은 아이가 어깨를 같이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사치였다. 하지만 그건 내 기준이었다. 오히려 일반 정시로 대학에 온 아이들에게 '특기자'라는 아이들이 그런 존재였다. '뭔가 좀 있어 보이는?' '글 좀 써본 아이들?'이었다. 나는 졸지에 '특기자'라는 훈장 때문에 부러움의 시선과 관심을 받게 되었다.

1학년 때는 괜찮았다. 다들 문학이라고 하면 고등학교 때 배운 게 다였으니까. 잘 쓰고 못 쓰고에 대한 판단도 잘 서지 않았다. 2학년쯤 되니 조금씩 잘 쓰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3학년이 되니 극명하게 갈렸다. 한 학기가 끝날 수록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어느 정도 두각을 내거나 자리 잡아갔다. 하지만 나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 우물만 팠던 친구들에 비해 나는 시도 조금, 소설도 조금, 시나리오도 조금, 수필도 적당히였다.(아동문학과 편집론까지 알차게 중간은 했던 것 같다.) 아주 심할 정도로 떨어지는 과목은 없었지만 어느 분야 하나를 특출 나게 잘하는 과목도 없었다. 나도 전공이 갖고 싶었다. 잘하는 분야가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졸업 전까지 어느 분야도 나에게 딱 맞는 걸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방송작가가 되었다. 그러니 나의 어설픈 재주가 나름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꽉 막히지도 않고, 시 조금, 소설 조금, 시나리오, 합평, 수필, 어설펐던 글솜씨와 말만 많았던 수다스러움으로 나름의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내가 맡은 방송원고는 최고의 수준을 요하지 않았다. 적당한 글 솜씨로도 밥은 벌어먹을 수 있었다. 어설프게 다 건들었기에 딱히 어떤 글에 대한 편견도 없었고, 모든 글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만 있었던 것 같다. 시도 소설도 수필도 시나리오도 내가 하기엔 다들 너무 커다랗고 벅차기만 해 보였다.

나는 늘 잘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일인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정말 잘했는지에 대한 늘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잘하는 것을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잘하는 게 없어서도 있지만, 하고 싶은 걸 하면 잘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글 쓰는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아직 어느 분야를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글이든 좋아한다. 시도 소설도 시나리오도 아동문학도 수필도 다 좋다. 천재가 아니라 단명할 사주는 아니라 하니 80 평생 천천히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80 평생의 반이 지났는데 아직도 내 글을 찾을 수가 없다. 근 30년간 뭘 써야 하나 생각만 했다면 이제부터 30년은 아무거 나라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지내? 오랜만이야!>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렇게 큰 실패는 처음이어서 그런가? 나는 꽤 오래 길을 잃고 방황했다. 익숙지 않은 고통에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지 좀처럼 답을 찾지 못했다.... 숨고 싶었다. 검은 옷에 묻은 얼룩처럼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고 누군가의 도움 또한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늘 그렇듯 혼자 해결하려 애썼다. 내 아픈 모습을 들키는 게 싫었고, 성격상 남에게 우울한 이야기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조개껍데기처럼 단단하게 마음을 닫고 가족을 제외한 누구도 볼 수 없게 하는 것. 그게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온기는 그리 많은 양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들 외롭고 마음 기댈 곳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누군가의 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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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출 나게 잘하는 건 없어도 나는 딱히 못난 구석은 없는 아이였다. 스스로 그렇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살았던 것 같다. 느리더라도 꼭 완주하는 아이. 성적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출석률만이라도 100%를 채우는 아이. 스스로 잘나지 않았지만 못나지는 않았던 생각했던 내 삶에 가끔 소용돌이가 칠 때면 나도 혼자만의 동굴에서 잔뜩 움추르곤 했었다. 늘 밖에서 하하호호하지만 외로움과 슬픔과 괴로움의 시간은 늘 나 혼자만 감내했던 것 같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투정하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어쩐지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니 아 피디로 살다 보면 이런 슬럼프를 겪게 되는구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작품의 실패였다. 아직 제대로 써보지도 않았으면서 실패를 논하기는 우습겠지만 시, 소설, 희곡, 보다도 돈이 많이들 어가는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는 내가(작가가) 못 썼을 때 받는 타격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많은 스태프들이 나 때문에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지레 겁먹고 드라마에 발을 안 들인 것도 있다. 물론 이론적으로 따지다면 우습겠지만 나는 시작 전부터 김칫국은 물론 10첩 반찬까지 다 미리 먹어보는 성격이다 보니 안 해도 될 걱정까지 종종 하고 있다.

어찌 됐든 그런 생각을 해봤던 나로서 실제 그 상황에 처한 피디님의 상황을 글을 보니 마음의 감회가 새로웠다. 상상하는 것과 그 상황에 처해본 것은 분명 다르다. 물론 상황은 글에서 나온 것보다 더 처절할 수도 더 심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거기까지. 문제는 어찌 됐든 일어서야 되고, 일어설 수 있다는 점은 희망적이었다. 누구에게나 넘어짐, 쉬어감은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리거나 방향을 틀어버린다면 아마 그 길을 끝까지 가볼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목적지를 정하고 가다가 힘들면 멈추거나 다른 길을 바라보곤 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절은 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런 면에서는 솔직하지 못한 것 같다.

외롭다 느껴도 다들 바쁘겠지 혼자 생각하며 주변에 연락하기를 머뭇거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인가 '어느 날을 기다리다가 영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들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워졌던 분들, 고마웠던 사람들, 언젠가 꼭 연락하리라 마음먹었던 사람들에게 언젠가 연락해야지 했지만 그러다 보니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심지어 어쩌면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흘러서야 용기를 냈다.

얼굴을 본 것은 2번, 전화통화를 한 것은 5번 정도였을까? 방송 시절 고마웠던 출연자에게 연락을 해봤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10년 전 그때 너무 고마웠노라고. 기억을 하시는지 못하시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반갑게 맞아주셨고, 잊지 않고 연락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그리고 한 명씩 안부 문자를 보냈다. 모두들 반가워해줬다.

'모두 바쁠 거야.'라는 내 생각보다 사람들은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모두 반가워해줬다. '언젠가'를 기다리지 말라는 말은 동의한다. 성공하면 꼭 연락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성공 안 하면 어때. 그때는 내가 성공해서 나를 만났던 것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을 만났던 시절로 돌아간다. 과거의 나는 그랬구나 새삼스러워지기도 한다.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그리웠던 사람들에게 다시 연락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날이다.



<에너지 도둑을 대하는 방법>


'네 무의식은 너한테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사람과 빼앗아가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본단다.'

색깔이 다른 건 상관이 없다. 설령 보색이어도 합쳐질 수만 있다면 조화로운 색이 될 수 있으니.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건 지속해서 부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에 굳이 듣기 싫은 이야기 계속 들어야 하나?"

"어렵게 지키고 있는 내 에너지를 왜 남이 가져가게 해?"


"어디 가서 누구 험담하지 마. 그게 돌고 돌아서 결국 너한테 돌아가니까!"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한테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사람과 빼앗아 가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니까.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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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콩쥐 콤플렉스가 있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에 시달리며 만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 왔다. 물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룹에 80% 이상의 우호적인 내 편이 있어야 나는 안심하곤 했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에너지 도둑에게도 한없이 친절하게 대한 무식한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정말 내 삶에 1도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니깐, 그래도 그 사람이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깐 잘한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곤 했다.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에너지 도둑에게 시달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그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에너지 도둑을 끊어내는 것만으로 내 삶의 질은 눈부시게 달라졌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면 에너지 도둑을 가까이 둘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나에게 친절해가 아니다. 그냥 좋은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나와는 전혀 친분이 없고 안면이 없어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걸 기운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만나면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어딘가 묘하게 불편함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런 기운을 철저하게 따진다. 물론 기가 불편하다고 해서 무조건 멀리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첫 만남에서 느낀 그런 기운은 실제로 맞는 경우가 많다. 어찌 사람을 한 번 보고 판단하냐고 하겠지만 한 번에 나는 하나를 보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말투, 행동, 생각을 본다. 그렇게 한 번 보고 나면 나와 맞는 사람인 지, 잘 맞지 않을 것 같은 지 반은 구분이 되는 것 같다.

간혹 내 주변에 아무것도 안 해줘도 그냥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나 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는 그 사람들을 좋아한다. 방송작가를 할 때 메인작가로 모셨던 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함께한 시간은 한 달 남짓이었지만 그냥 좋았다. 예쁜 얼굴, 친절한 말투, 꼼꼼한 성격과 뛰어난 글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후배를 챙겨주는 마음.... 그냥 좋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안부 핑계로 가끔 연락을 드렸고, 방송일을 할 때는 같이 일하진 않더라도 한 번씩 충고와 조언을 해주는 사이로 지냈던 것 같다.

방송을 떠나고 직접 만날 일은 없었지만 그분의 SNS에 가끔 찾아가서 글을 보고 사진을 보며 '좋아요'를 누른다. 나는 정말 그분이 좋다. 좋은 사람이니, 잠깐의 인연을 핑계로 한 번씩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10년 전에 만난 꼬마작가는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아줌마가 되었다. 여전히 예쁘고 상냥한 작가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참 멋진 분이구나! 나도 이런 작가가 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도 괜찮다. 어찌 됐던 아직은 아는 사이(?)니까.


<비 오는 날, 어릴 적 우상과 함께>


'여기서 떨어져 죽지만 않으면 잠깐, 아주 잠깐이라도 푹 쉴 수 있지 않을까?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며칠이라도 좋으니 아무 생각 없이 누웠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어. 첫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는 사람, 둘째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 만약 여기서 최 PD가 포기한다면 절대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될 수 없어.... 그러니 도망치지 마. 최 PD는 연출하고 싶어서 온 거지 조연출 하고 싶어서 온 게 아니잖아.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카메라 앞에서 큐를 해본 다음에야 알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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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종종 했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뉴스에서 막내 작가가 혹은 막내 조연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아남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마음이 찢어짐이 반복됐다. 극한의 공포와 한계치에 달한 업무량에 시달리던 지난 시절이 그랬었다. 결국 나는 백기를 투항하고 방송을 떠났다. 잘 떠나왔다고 안도하면서도 한 번씩은 그 자리에 계속 머물렀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잘 버텨낼 수 있었을까?

처음 막내작가를 하겠다고 갔을 때, 반절은 노 관심이었고, 반절은 환영해주었다. 막내는 사랑이라면 반겨주었던 피디님은 아주 탈탈 털어가며 나를 굴리셨고, 버텨서 내 후배가 될지 그냥 나가버릴 뜨내기 작기인 지 잘 모르겠다고 냉량하던 작가님은 나에게 연애상담을 하며 잠깐의 절친이 되기도 했다. 가장 빛나야 할 시절, 가장 파릇하고 예쁜 시절을 여의도 회사 책상 한구석에서 촬영 테이프 프리뷰를 하며 보냈다. 집보다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고, 누워 자는 시간보다 회사에 앉아있는 시간이 월등히 많았던 날이었다. 그렇게 힘든 막내를 지나 서브의 자리에 올라 겨우 할만해지니 방송을 떠났다. 아까우니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약간의 확신도 있었다. '이 바닥은 나랑 안 맞아.'

특히 방송은 누구와 일하는지가 중요했다. 좋은 작가, 좋은 피디와 일하는 시절도 있었지만 그럼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다. 빡빡한 스케줄이라던지, 낮은 월급, 혹은 아주 예민한 보스 등이 그것이었다. 10년만 고생하면 된다고 했는데... 5년이라도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도망 왔다. 나에게 방송작가의 재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제대로 큐 사인을 해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 편으로는 후회가 없다. 해보고 싶은 직업이었고, 직접 해봤고 나름의 보람도 느꼈던 직업이었다. 그저 나에겐 방송원고보다는 다른 글을 쓰는 게 더 좋은 거라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그 분야를 찾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직 내 원고는 나오지 않았으므로 내가 어떤 글을 잘 쓰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나는 지망생이 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니깐 작가가 되고 싶어서 쓰는 거니깐.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의 끝자락에서 만난 '엉클 조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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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 토론토에서 젊은 동양인 남자 초이와 50대 중반의 노숙자 아저씨가 나란히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상상이 되었다. 내가 경험한 것도 아니지만 누구나 비슷한 외로움은 겪어봤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어떻게 그 외로움을 이겨냈었을까? 청년 초이와 엉클 조지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뭔가 마음이 찡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안 그랬으면서>

정말 그런 걸까?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보자.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콤플렉스 혹은 욕망을 투영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해서 그런다는 어설픈 핑계로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정작 우리는 안 그랬으면서.... 그렇게 열심히 안 했으면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였다. 아이는 부모의 꼭두각시가 아닌데, 마치 아이들이 자신들의 분신이라도 되듯이 최고로 키우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정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맞을까? 엄마인 아빠인 우리 어른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괜히 마음이 찔렀다. 사람들이 걱정과 시대의 흐름에 나는 정말 든든하게 우리 아이들을 막아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이 정말 아이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맞을까? '적어도 그때의 나만큼만 해라'는 나의 말은 사실 거짓말이 조금 섞였다. 열심히 한 적도 있고, 열심히 논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안 그랬기에 더 해주고 싶은 것들도 많다. 하지만 그게 정말 아이가 원하는 건지, 내가 아이가 다시 된다면 하고 싶은 지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나도 우리는 우리다>

"그렇다고 제가 직접 손님을 불편하게 한 건 아니잖아요. 근데 왜 저한테 그러세요?"


알게 모르게 우리는 '타이틀'이라는 편견에 갇혀서 상대방을 바라본다. 그 회사, 혹은 그 집단이 그 개인이 지닌 역량인 것처럼 간주하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전부는 아닌데 말이다.

나는 나고 우리는 우리다! 개인의 잘못을 집단으로 일반화해서도 안 되고, 집단의 잘못을 개인이 책임져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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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그 호텔의 컨시어지의 말은 뭔가 시원한 사이다 맛이다. 물론 당한 고객이 나였으면 불쾌하고 화나긴 하겠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서비스업인 '호텔 직원'과 고객 사이에서 자기 할 말을 저렇게 똑바르게 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부럽다.

나는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들에 사과를 참 많이 했다. 일단 빠른 사과는 일을 크게 벌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단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면 대부분 한소리가 만다. 아니 난리부르스를 친다 해도 일단 불이 빨리 꺼지기는 하니깐 말이다. 어찌 보면 '갑'과 '을' 관계 같아 보이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부분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하는 용기와 포부는 닮고 싶어 진다.

막내작가를 하던 예전엔 모든 게 다 죄송했다. 바쁜 데 전화를 건 것도 죄송하고, 장사하는데 촬영을 가겠다고 하는 것도 죄송하고, 지인을 섭외해서 같이 출연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다 죄송했다. 나를 위한 것도 아닌데 모두 내가 죄송했고, 촬영팀이 늦어도 죄송했고, 피디가 실수를 하고, 자막팀에서 실수가 있고, 출연자가 늦어도 다 내가 죄송했다. 간혹 당돌한 막내들은 자기의 잘못이 아닌 것을 따지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무개념에 싸가지라는 오명을 받으면서 질타를 당해야 했다.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울어도 죄송할 일, 아이가 만져도 죄송할 일,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 미안한 일이 참 많았다. 그냥 괜히 시끄러울 일, 욕먹을 일 만들지 말자는 신념으로 했던 행동이 나 자신의 자존감은 참 많이 깎아먹은 것 같다.

우리의 무의식 중에 깔려 있는 은연중의 생각이란 것도 참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늘 받아왔던 해택과 서비스는 고마운 것이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다시 새겨본다.


<아파트 동대표>


평생 미원, 다시마 같은 조미료는 주방에서 본 적이 없다. 음식에 넣는 소금도 다른 집의 반의반 수준이다. 수영장에 가면 나만 물에 뜨지 않았는데 아마 남들보다 체내 염도가 낮아서 그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엄마. 나도 친구들처럼 소시 자랑 게맛살 같은 맛있는 음식 먹고 싶어요!" 막내인 내가 거의 울다시피 말하자 엄마는 속상하셨는지 알겠다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음 날 웰시코기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학교에 뛰어간 나는 점심시간이 되자 자신 있게 도시락을 열었는데 이런. 알록달록 예쁘게 모양낸 연근과 우엉이 잔뜩 들어있었다. DMZ는 더 확장되었다. 엄마는 그만큼 고집 있고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붕어빵 아줌마


너무나도 그리웠던 냉기다. 얼마나 반갑냐면 두 볼을 찬 바닥에 대고 온종일 비빌 수도 있다. 설령 구안와사가 와서 입이 찌그러져도 노트르담 꼽추처럼 하하하 웃으며 목젖으로 종을 칠 수 있다. 너무하다고? 이 땅의 많은 남편은 공감할 것이다. 가끔은 자신만의 동굴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터가 아닌 가족들의 이야기에는 따뜻함과 위트가 넘쳤다. 자극스럽지 않고 무난하지만 툭툭 웃음이 묻어 나오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뵌 적 없지만 엄청 멋질 것 같은 어머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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