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서 병이 생길까? 병이 나서 화가 날까?
<직선과 곡선>. -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본래 자연은 곡선이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끝이 빤히 내다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모르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묘미이다.
직선은 조급, 냉혹, 비정함이 특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이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 역시 곡선의 묘미이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면서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서..
==============================================
병원에서 '병'이라는 진단과 함께 내 마음에 '병'이 생겼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키웠는지, 몸의 병이 마음의 병을 키웠는지 모르겠다.
부쩍 예민해지고, 부쩍 화를 내고, 부쩍 우울해진다.
남들의 위로도 긍정의 말도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아픈 사람은 정작 나인데, 다들 '괜찮다'라고 말한다.
내가 괜찮지 않은데... 왜 남들은 괜찮을 거라고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어쩌냐.. 안 됐다.. 큰일이다.' 소리도 싫다.
내 마음은 하루에 수십 번씩 오락가락하고 있다.
요즘엔 평소라면 그냥 넘어갔을 일에도 예민하게 굴었다.
집안의 대소사가 많은 친정엄마는 병에 걸린 딸을 도와주겠느라고 딸의 집인 우리 집으로 오셨다.
아흔의 시부모님, 친정부모님 챙기기에도 바쁜 엄마에게 아픈 딸까지 챙기라는 게 영 찜찜했지만
엄마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며 도와주고 싶다고 하셨다.
솔직히 어린 시절 엄마와의 시간이 없던 나는 엄마를 참 그리워했다.
사는 게 바쁜 엄마에게 나는 애교 있는 딸도 아니었고, 그저 무난한 딸이었다.
딱히 손이 가는 것도, 신경 쓸 일도 없고, 밥 차려주면 주는 대로 먹고, 뭘 요구하거나 사달라고 떼쓰지도 않았으며,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무난한 아이, 성적이 아주 우수하진 않아도 딱히 떨어지지도 않은 중간, 학교생활도 어른들 말씀도 잘 듣는 아이였다.
엄마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자랑할 때, '거저 키웠다'라는 말을 종종 하셨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는데도 나쁘지 않게 잘 자랐다는 거였다. 그 말은 칭찬이었지만 나는 어쩐지 좀 서글펐다.
나는 거저 크고 싶어서 큰 게 아니라, 커져 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을 뿐이었다. 나에게도 응석 부릴 엄마, 아빠가 있었더라면 나도 거저 크지 않고 응석 부리며 크고 싶었다. 아니 똑같은 엄마와 아빤데 언니와 남동생에 비해 나는 응석을 부릴 수 없었다. 힘든 엄마의 삶에 나까지 무겁게 매달릴 수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의 위해 열심히 생활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엄마의 관심에서 나를 멀어지게 만든 요인이었다. 엄마에게 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딸'이었다. 그것은 큰 장점이면서 나 스스로에게는 조금 쓸쓸한 일이었다.
건강검진 후 병원에서 기본 검사를 마치고, 드디어 수술 날짜를 잡았다. 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수술이었다. 수술 이후에 어떤 일들이, 어떤 치료가 더 남아있을지는 지금 상태에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빨리 내 몸에서 못된 종양 덩어리를 떼어내는 것만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큰 숙제였다.
병원 수술 날짜가 잡히고, 엄마는 밀린 일을 하시겠다며 잠시 본가로 내려가셨다. 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아직 수술 전이라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엄마를 보내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에게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조카가 수족구에 걸려서 아프다는 것이었다. 수족구는 전염성 질병이다. 아이들 어릴 때 수족구를 겪어봤기에 약한 수족구에 대해서도 알고 무서운 수족구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첫째의 경우 대부분은 약한 수족구로 무난히 넘어갔지만 둘째가 어릴 때 걸린 수족구는 배와 등은 물론 허벅지 종아리까지 빨간 수포가 가득했고, 손톱과 발톱이 다 빠지고서야 끝이 났다. 그래서 나는 '수족구'라는 것이 어린아이들이 걸리는 '수포가 있는 전염성 질환' 정도로 가볍게 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가볍게 지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주 위험한 질환이기 때문이었다.
맞벌이를 하던 동생네를 생각하면 올케가 너무 안됐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가끔 도와주시긴 하지만 최근 임신까지 해서 몸이 힘들 것이었다. 조카를 생각하면 너무 안쓰럽지만 가끔은 워킹맘이기에 친정엄마 와 시엄마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게 부러울 때도 있었다.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한 나는 두 아이의 육아를 하면서 친정과 시댁의 도움을 받아본 경우는 출산과 허리 치료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정도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수술을 앞두고 잔뜩 예민해진 나에게 엄마는 '수족구에 걸린 손녀를 돌봐주러 동생네 집에 다녀오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수술 전에 면역력이 중요한 데다가 친정엄마가 코로나 후유증으로 계속 몸이 안 좋으신 상황이었다. 엄마가 걱정되어 이번에 건강검진도 할 겸 일주일 푹 쉬다가 올라오시라고 보내드렸는데... 그 짧은 휴식기간에 엄마를 불러들인 동생이 얄미웠다.
물론 올케나 동생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누나의 수술까지는 2주가 넘는 시간이 있으니 한 3~4일만이라도 엄마가 봐주시면 주말 끼고 가정 보육하다가 다시 어린이집에 보내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몸에 병에 이어 마음까지 고약해진 나'였다. 임신도 생애 큰 문제이지만 나에게 나의 병이 더 중요했다. 누나가 암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누나의 간병을 해주시기로 한 엄마를 꼭 불러야만 했을까? 아무리 수족구가 아이들에게 위험하고 어른들은 잘 안 옮는다고 하지만... 반대의 입장이라면 동생은 이해할 수 있을까?
동생의 입장에서도 누나의 수술보다도 당장 회사의 일과 아이의 건강이 걱정될 수밖에 없다. 자식들 사이에 낀 엄마는 난처해했다. '본인의 건강검진은 미루고, 수족구는 최대한 안 걸려서 건강하게 돌아오겠다'라고 약속하셨지만 나는 엄마가 건강검진을 미루는 것도 싫고, 조금의 미세한 감염력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마음이 삐뚤어졌다. 좋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속이 상해 언니에게 전화를 했더니 내 마음이 문제란다.
화를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본다. 수족구가 전염성이 있을 경우 누구에게 돌봐달라고 말하기가 애매하다. 가족이나 부모가 봐야 하는데, 둘 다 맞벌이에 올케는 임신 중이라 위험하다. 그렇다면 남동생이 봐야 하는 게 맞지만 오랫동안 휴가를 낼 수 없으니 부탁하는 것이다. 사실 동생의 경우 올케의 친정어머니가 주로 돌봐주셨는데 남동생과 장모님 사이에 오해가 있어서 장모님이 도와주지 않으시겠다며 가셨다고 했다.
머리로는 동생네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답답하고 속상할 그 마음이 어떨지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마음이 묘하게 삐뚤어졌다. 나는 혹시라도 나의 컨디션이 잘못되어 수술이 미뤄질까 봐 조심을 하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내 상태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똑같다. 다만 그전엔 순리대로 형편대로 생각했다면 지금은 내가 아프다고 나는 내 위주로 생각하는 것만 달라졌다.
언니도 엄마도 나에게 예민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본인들은 내 상황이 되면 침착할 수 있을까? 나도 이제 겪어보니 알겠다. 아픈 환자인 당사자와 가족은 염연히 다르다.
가족이라고 내 아픔, 내 고민, 내 슬픔을 공유할 수는 없다.
말을 할수록 나는 쪼잔한 사람이 되고, 예민한 사람이 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성격이 지랄 맞은 이상한 사람이 된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책 한 권을 폈는데, 마음에 들었다.
곡선과 직선
인생의 직선과 곡선이 있다면 나는 곡선을 택할 것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빨리 가지 않아도 되니 그저 아름답고 안전한 길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생의 굴곡점에서 가끔 앞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오면 쉽게 낙담을 하게 된다.
이 길 끝에 뭐가 있을지 걱정하고 고민하게 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곡선이라면 달랐을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에 그 역시 괴로웠을 것이다.
아니 너무 빠른 속도 때문에 숨 막혔을지도 모른다
인생 곡선길을 우아하게 회전하다 어느 날 갑자기 바위에 부딪혔다.
아프다. 아프다. 일어나기도 싫고, 쉬었다가 가고 싶다.
일어서라고 해도 싫고, 넘어진 겸에 쉬었다 가라고 하는 소리도 싫다
일어서기도 두렵고, 곡선을 지나 계속 나아가기도 두렵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족들은 일어나든지, 쉬던 지 선택을 하라고 한다.
넘어진 것이 앞을 안 본 것 때문이라고, 신발 끈을 잘 묶지 않아서라고, 너무 서둘러서 그런 거라고
저마다 이유를 대지만 나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은 조용히 예측해본다.
그러니 조금은 느리더라도,
조금은 답답하더라도,
조금은 지랄 맞더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줬으면 좋겠다.
이 고비가 넘어가면 나는 다시 평화롭고 유순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22.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