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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씨앗 Jun 13. 2024

[부부일상] 신혼집 구하기

 우리가 '신혼'때를 잊으면 안 되는 이유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그때 - '신혼'이야기


결혼 10년 차가 넘었지만, 연애도 1년, 신혼도 1년이었다.

모아놓은 돈도 없는 20대 청춘이 경기도 남부, 신도시에 17평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구했다.

 서울에서 자취를 했던 나는 원래 살던 집과 짐이 있긴 했지만 결혼이란 새 출발과 함께 신혼살림으로 갈아탔다.

  당시 나는 서울에 살며 다세대, 원룸 등 다 살아봤기에 집에 대해 딱히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신혼집을 구하려는데 남편과 의견차가 벌어졌다. 남편 직장은 평택이었고, 나는 서울로 출퇴근을 했었다. 나는 경기도 최남단인 평택으로 내려가기 싫다고 했고, 남편은 회사가 멀어서 서울은 절대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둘 다 차로 1시간 지역인 경기도 남부의 신도시를 우리의 신혼집으로 정했다.

 집의 형태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다세대면 어때, 둘이 행복하게 잘 살면 되지.' 나는 그냥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남편은 신혼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었나 보다. 아마 회사 선배들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겠지? 남편은 좁아도 좋으니 꼭 아파트에 살아야 된다고 했다.


 "난 꼭 아파트 안 살아도 돼. 빌라나 다세대로 가면 방도 넓고 훨씬 좋은데..."

 "네가 안 살아봐서 그래. 다들 아파트 아파트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쓰레기 버리는 문제부터 치안까지, 왜 아파트 값이 비싸겠어. 좋으니까 비싼 거지. 집이 좁아도 아파트로 갈 거야."


 돈이 없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나도 아파트가 싫은 게 아니라 아파트가 비쌌기 때문에 망설였을 뿐이었다.

 

 "우리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아파트를 어떻게 구해?"

 "전에 모아뒀던 돈이랑 대출받으면 될 거야."



 남편과 나는 결혼을 앞두고 신도시 아파트를 구경하러 다녔다. 지어진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아파트들은 겉은 멀쩡했는데 집집마다 상태는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수리가 된 집은 살만했지만 가격이 비쌌고, 수리가 안 된 아파트에는 '아직도 이런 집이 있어?' 할 정도로 처참했다. 옛날에 220v 쓰기 전에 110v를 썼는데, 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나 보고 기억에서 사라진 110v가 벽면에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차라리 깨끗한 신축 빌라가 낫지 않아? 아무리 아파트라지만 상태가 너무 심각한데?"


 나는 여전히 빌라를 주장했지만 남편에겐 통하지 않았다. 돈에 맞춰서 집을 구하려니 도저히 집을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시댁에서 예물에 대해 물어오셨다. 예단도 변변찮은데 내가 예물을 바랄 처지는 아니었던 터라 괜찮다고 사양했다. 그냥 결혼반지 하나 있으면 되지 않나? 귀걸이 목걸이는 내가 평소에 좋아해서 많이 사둬서 별 관심이 없었고, 가방에 대한 욕심도 딱히 없었다. 남편과 나는 시댁에서 주신 예물비를 받아서 집 사는 데 보태기로 했다. 정확히는 시부모님이 남편에게 지원해 주신 돈이었다. (참고로 남편이 내 생각이 기특하다며 자기 월급으로 명품가방이랑 목걸이세트까지 다 사줬다.)

 그렇게 여기저기 모은 돈 '1억'을 가지고 신도시 17평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이삿짐이 들어오기 전 집은 휑하고 조용했다. 나와 남편은 복도 옆에 붙은 작은 방에 나란히 이불을 펴고 누웠다. 가구도 없이 텅 빈 방안이라 우리의 말소리가 울려서 동굴처럼 퍼졌다. 남편과 나는 큭큭대며 웃었다. 우리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나중에 여기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해 줄게."

 "나는 여기도 충분히 크고 좋은 집이야.  고마워."

 "우리 지금의 이 굴욕을 잊지 말자.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방에서 우리 목소리가 왕왕 울리는 이런 기분 말이야"

 "이게 왜 굴욕이야? 낭만이지. 나중에 생각해 보면 다 추억이고, 낭만이야. 사실 난 지금도 행복해."


17평 첫 신혼집(2011년)


  거실 겸 큰 방과 작은 방이 다인 방 2칸의 신혼집이었지만, 좋았다. 아침이면 햇살이 따뜻했고, 앞 뒤로 문을 열면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으니까... 새 이불, 새 그릇, 새 수건... 모든 물건이 새 거였다. 주말엔 남편과 함께 게임을 하거나 마트에서 장을 봐오고, 함께 꽃구경도 다녔다. 저녁이면 함께 동네 체육공원을 걸으며 일상을 이야기하거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오랜 자취 생활에 익숙했던 나에게 진짜 '가족'이 생긴 듯했다. 부모보다 든든한 누군가가 생긴 기분... 비록 기간은 짧았지만 행복했던 신혼이었다.


 요즘 집값이 비싸서 결혼을 못한다는 소리가 있어서 내 신혼 때를 잠깐 떠올려 봤다. 물론 그때가 지금보다 집값은 저렴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돈은 항상 부족했다. 남편도 내가 처음 결혼하자고 했을 때 모아놓은 돈이 없다며 망설였다.

 "우리가 오래 연애하고 돈도 더 벌고 결혼하면 그만큼 신혼집도 커지고 형편은 더 나아지겠지만, 하지만 그때 가면 거기에 맞게 우리 눈은 더 높아져. 지금이야 사회 초년생이니까 모아놓은 돈이 없다고 변명이라도 하지만, 그때 가서는 나이 때문에 더 눈치 봐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고.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그 선이 점점 높아지니까."


 나의 설득은 통했고, 결국 입사 1년 차인 남편과 결혼에 성공했다. 우리는 꽤 빨리 결혼한 편이었고, 초반에 자금적 여유가 부족했던 건 다 결혼을 일찍 한 탓으로 돌렸다. 결혼하는데 모든 비용을 다 쓰고 나니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모아둔 돈이 없어서 더 열심히 모았다. 연애 때 서로에게 잘 보기 위해 쓰던 돈, 서로의 마음을 얻기 위해 썼던 돈을 모아 '함께쓰기 위한 돈'을 마련했다. 데이트 비용은 생활비가 되었다.

 

함께 걷던 집 근처 산책길..2011년 가을


 살다보면 우리는 신혼 때의 그 달콤했던 기억을 잊고 살아간다. 둘이 함께라서 좋았던 그 시절 말이다. 결혼을 하면서 연인에서 부부가 되었고, 지금은 부부에서 가족이 되었지만 종종 그때의 이야기를 나누며 이야기하곤 한다. 그 시절 우리는 부부였고, 동지였고, 친구였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낸 추억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소소하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소재'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신혼'을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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