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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씨앗 May 27. 2024

백일장의 추억

친구 따라 백일장을 가다


 작년 가을,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에 함께 나가자며 친구에게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그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온라인 고교 문학모임에서 만났다. 내향인이었던 나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고, 몇몇 친구들과 메일로만 소통하곤 했다. 그때 만난 친구 중 하나였던 그 친구와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와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2002년, 수능이 전부였던 그 당시 수시 입학이라는 제도가 처음 생겼고, 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시로 대학진학하는 법을 모색하고 있던 시기였다. 성적이 특출 나게 우수하지 않았던 나도 다른 특기(?)로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말에 친구들을 따라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곤 했었다. 제2 외국어였던 불어 외에 일본어를 배우기도 했고, 청각장애인과 손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말에 기초 '수화'도 배웠다. 다른 봉사활동도 열심히 참여했는데, 그나마 내가 도전해 볼 수 있는 종목이 봉사분야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마침 친한 친구가 시각장애인 도서관에서 타이핑하는 봉사활동이 있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꽤 오랜 시간 타이핑 봉사를 하기도 했다. 봉사활동 시간 120시간을 채우고, 컴퓨터 자격증과 수화 기초 수료증도 땄지만, 대학 수시에 도전하기엔 너무 부족한 경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학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친구가 백일장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다. 혼자 가기 심심했다는 게 첫 번 째 이유였고, 정규 수업을 빼고 가야 하니 친구들과 다 같이 가면 담임에게 눈치가 덜 보이는 것이 2번째 이유였다. 친구의 설득에 우리 반 7명 정도가 백일장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일반 백일장의 경우는 대부분 문학동아리나 평소에 글쓰기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나갔는데, 그때 나와 함께 대회에 나간 친구들은 그냥 잘 어울리는 한 무리였을 뿐이었다.

 지금은 주 5일 학교를 다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2001년에는 주 6일 학교를 다녔다. 백일장은 토요일에 열려서 백일장에 참가하게 되면 토요일 수업을 빠질 수 있었다. 영어 담당이던 우리 담임선생님은 우르르 백일장에 나가겠다는 아이들을 보며 한숨을 쉬셨다. 그때는 그게 참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평소엔 관심도 없던 백일장에 학교수업도 빠지고 나간다고 하니 선생님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 어찌 됐든 친구 따라 나는 백일장에 나갔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나 역시 첫 백일장이었다. '시'라고는 학교 수업에 배운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육사의 광야,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윤동주의 서시'같은 교과서적인 시가 대부분이었고, 간혹 대학생 언니가 자주 읽던 '원태연'시집이나 '백석'시집, '윤동주' 시집이 다였다.  일단 친구 따라 용감하게 나서긴 했는데 도통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혔다. 그런데 마침 주제도 내가 쓸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즉석에서 나온 시어를 보고 시나 소설을 써야 했다. 주제를 쭉 둘러보다가 그나마 주제 중에 '감나무'라는 시어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나는 감나무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학원 친구가 감나무에서 감을 땄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더듬더듬 시를 쓰고, 시를 운율에 맞춰서 고쳐보고, 다시 읽어보고 내용도 다듬어서 고쳤다. 그러는 사이, 이미 많은 학생들이 원고를 제출하고 나가 있었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는 겨우 원고를 제출하고 친구들 곁으로 함께했다. 내가 참여한 백일장은 그 당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회였는데, 친구 말에 의하면 걸린 상이 꽤 많았다고 했다. 일단 운문부와 산문부로 나누고, 각각 운문부 장원 1명, 우수상 2명, 가작 3명, 장려상 10명이었다. 운문, 산문을 다 합치면 30명이었고, 내가 지원한 운문 분야만 따져봐도 15명이었다. 친구들과 나란히 앉은 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상이 너무 타고 싶었다. 딱히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갖고 싶었다. 괜한 욕심 같은 거라 생각도 들었지만,  장려상 10명의 이름의 마지막에 꼭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니들이 가봤자...'라고 얕보던 담임에게 당당해지고 싶었다. 산문부가 먼저 발표 됐다. 수상자 15명 중에 우리 학교 학생도 있었다. 운문부 장려상을 받은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기로 학교에서 이미 유명한 아이였다. 우르르 나간 거 치고는 어쨌든 우리 학교에 1명의 수상자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운문부 수상자 발표시간이 되었다.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뛰다가 심장이 과열되어 터지는 건 아닌 지 걱정이 되었다. 심장은 마구 뛰는데, 왠지 모르게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얼굴이 금방 발그레 지며 화끈거렸다. 처음 나간 백일장에서 처음 시를 써보고, 바로 수상을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심장아, 나대지 말자. 내가 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래. 그래도 하느님,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저 더 열심히 살게요. 더 노력하며 살게요.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전주 00 여고, 2학년....."

 우리 학교와 학년이 발표되는 순간, 나란히 앉은 친구들과 손을 맞잡았다. '제발'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불렸다. 가작이었다. 친구들은 축하하며 나를 얼른 나가라고 등 떠밀었다. 강당에서 시상대로 올라가는 길을 어찌 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발거음이 가볍다는 게 이런 뜻일까? 아니, 발이 얼었다는 표현이 이런 것일까? 발이 감각이 없다는 정도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다리가 휘청 휘청거렸다. 놀라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고,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학창 시절, 학교생활은 늘 열심히 했지만 내 맘대로 된 건 없었다. 성적도 교우관계도 내가 바라는 것처럼 잘 이뤄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상을 타게 되다니... 그것도 내가 꿈꾸던 상보다 높은 상이 었다.

 

 고등학교 2학년, 뭐 하나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없고, 어느 대학, 어느 전공을 할 지도 막막했던 시간이었다. 수학은 못하고 국어와 사회를 잘해서 문과를 선택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던 내가 백일장에서 탄 상 하나로 '문학'을 전공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찌 됐던 상을 탔다는 건 그 분야에 일말의 '소질'이라도 있다는 것일 테니까. 고교 시절 첫 백일장 대회였고, 마지막 백일장이었다.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좋았다. 간절하게 바라던 뭔가가 이루어진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비록 상 하나였지만, 뭐든 다 어중간하고 애매했던 나에게 확실하게 잘했다고 해준 것은 그 백일장이 유일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옛 일이지만, 아직도 눈 감으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10월의 어느 눈부신 날, 가장 행복했었던 그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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