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nsix Jun 14. 2023

Appetibile Verona

2023 이탈리아 여행기 6 - 03242023

한적하게 즐기는 낭만의 도시, 베로나 

# 백 년도 쉽지 않은데 2천 년. 

현재 한국에는 중소벤처기업부에서 30년 이상의 소상공인 가게를 골라 백년가게로 인증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도 100년 이상 존속하는 가게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인데, 서울, 그리고 한국에서 100년 넘는 가게 혹은 건물을 만나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인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웃한 일본만 가봐도 100년 이상의 업력을 지닌 가게 혹은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닌 건축물이나 유적 등을 많이 만날 수 있고, 유럽으로 넘어오면 100년은 그냥 우습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도 오래된 유적이나 도시를 특히 많이 만날 수 있는데, 밀라노 동쪽의 소도시 베로나도 그런 도시 중 한 곳이다. 

지난 2000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도시 구조와 건축 면에서 이전 시대 최고의 예술적 요소들을 통합하여 2천 년에 걸쳐 꾸준히 발전해 온 도시의 뛰어난 사례이며, 유럽 역사에서 여러 중요한 시기를 거치면서 발달한 요새 도시의 개념을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베로나 [Verona] (유럽지명사전 : 이탈리아)

그러니까 중요한 건 단순히 2천 년이라는 역사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왔고, 도시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그 시간들을 축적해 왔다는 사실이다. 여정에 베로나를 포함시킨 건 단지 밀라노에서 베니스로 향하는 와중에 잠시 들러볼 만한 소도시라는 이유로 일종의 메인 메뉴가 아닌 서브 메뉴 같은 선택이었지만, 이 도시 또한 서브메뉴라 하기에 너무나 매력적인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전날 저녁에 도착했던 기차역 Stazione Verona Porta Nuovo, 숙소 발코니에서 보이던 풍경. 발코니에서 보이던 주차장 같은 공간은 캠핑카를 위한 캠핑 공간이었다

# 여전히 현역인 Arena

전날 꼬모호수 자전거 라이딩의 여파로 허리와 다리에 근육통이 남았다. 여행은 훈련이 아니다. 확실히 여행 와서 훈련하듯이 네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어쨌든, 숙소에 체크아웃을 하고 베로나의 명소 아레나로 향했다. 

베로나 아레나는 기원전 1세기 경에 지어진 로마시대 원형극장으로 현재도 여름이면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다.(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페스티벌이 한창인 시즌. 오페라, 콘서트 등등 여러 가지 이벤트가 열리고 있고, 올해가 Arena Festival이 100년을 맞이하는 해라고.) 약 2만 5천에서 3만 명이 수용 가능한 규모의 아레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을 보려고 전 세계에서 50만 명 이상이 모여든다고 하니 더 보탤 말이 필요할까. 중요한 건 유적이 그저 보존에 그치지 않고 여전히 공연장으로 활용된다는 것. 처음 지어진 기원전 1세기라는 시간은 그저 문자로 감각될 뿐, 서기 2천 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 시간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처음 지어진 이후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검투장, 과일시장, 우시장, 지금의 오페라 극장까지 그저 무너지지 않고 있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늘 동시대의 시민들이 이용하고 찾았던 공간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이미 은퇴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여전히 현역으로 남아 있는 존재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화석같이 존재하는 유적이 아닌 동시대인들의 삶과 함께 하는 살아 있는 공간으로 지난 2천 년을 보내온 곳이라는 사실이 이 아레나가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많은 이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관객석 스탠드 위에 올라가 있을 때 한 무리의 청소년 그룹이 필드에 모여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장면이 보였다. 그리고는, 그들 중 한 친구가 육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곡목은 보헤미안 랩소디. 독창이었고 마이크나 앰프 같은 증폭장치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노랫소리는 수십 미터는 넘게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도 선명히 들려왔고, 이것이 이 아레나가 여전히 현역으로 남을 수 있는 비법이라 생각했다. 이와 함께 스탠드 한쪽에선 일군의 사람들이 석조 스탠드 보수작업을 벌이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고, 보수해 가면서 활용도를 유지하며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것, 이러한 이들의 노력이 내가 아레나에서 느낀 가장 큰 감명이었다. 나는 이러한 노력이 소위 관광 명소화 내지 그 어떤 다른 경제적 이득을 우선으로 한다기보다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땅, 같은 지역에서 먼저 살다 간 이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통해 문화의 뿌리와 맥락을 생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적 인간이 모여 사는 문화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현재 한국은 어디를 가든 관광을 활성화하겠다고 난리다. 지역의 명소를 찾고, 지역 특산물을 개발하고, 관광 코스를 만들고,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마련하고, 캐릭터와 로고를 만들어 SNS에 홍보하고,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 뿌리고,,,, 이런 노력들을 다 좋다고 치더라도 하나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관광자원화 내지 관광 편의성 증진 이전에 지역과 문화,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지역민들을 존중하는 태도와 시각이 선행되었으면 한다. 지금 한국에선 문화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기보다는 도구적인 시각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여행을 하는 건 단지 시간과 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 아닌 다른 지역과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이야기를 만나고 이를 통한 감동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이러한 이유와 의도를 이해한다면 거의 모든 지역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광활성화 정책이나 제도들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열창하고 있는 모습. 아무런 장치 없이 육성만으로 극장 전체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음향 설계를 이미 2천 년 전에 해놨다는 것. 
고대 건축의 핵심인 아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아레나 외벽과 스탠드를 보수중인 사람들. 오랜 역사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이들의 노력이 아닐까.

# 작지만 알찬 도시, 베로나 

베로나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키워드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의 지역적 배경이 바로 베로나라는 것. 그래서, 또 유명한 방문지가 줄리엣의 집이다. 이런 게 재미있는 것이 사실 작품 속 가상 인물인 줄리엣의 집이라는 게 현실에 존재할 리 없지만 가상의 공간을 현실에 만들어놓고 사람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또 하나의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것들 모두가 일종의 선의의 거짓말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예술이 사회에 작용하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줄리엣의 집을 찾아온 수많은 방문객을 뒤로하고 베로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줄리엣의 집에 세워진 줄리엣의 동상. 그리고, 로미오의 집도 있다는 사실. 
시뇨리 광장에 세워져 있는 단테의 동상. 탄생 60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베로나 시내에서 가장 높은 탑인 람베르트 기념탑. 

 

베로나의 또 하나의 명소 피에트라 다리. 사진 속에 보이는 피에로 분장을 한 마임이스트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피에트라 다리 위에서 바라본 아디제 강의 전경. 2천 년을 이어 온 도시의 역사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풍경이다. 

# 푸니쿨라를 타고 산 피에트로 성으로 

누구나에게 익숙한 푸니쿨리 푸니쿨라(Funiculi Funicula)란 노래가 있다. 이탈리아 작곡가가 만들고 세계적인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버전으로 유명한 곡으로 중간에 나오는 얌모얌모얌모얌모야 라는 후렴구로도 매우 유명한 곡이다. 흔히 이 곡을 마치 이탈리아의 구전 민요로 알기 쉬운데, 사실은 나폴리 베수비오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기차를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캠페인 송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푸니쿨라는 급격한 경사로를 올라가는 강삭철도를 뜻한다. 이런 철도는 유럽에서 자주 만날 수가 있다. 마찬가지, 이탈리아에서도 몇 번을 경험하였는데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이 아닌 실제 교통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 주민들을 위한 이동수단으로써의 용도가 먼저이고, 관광 명소로서의 성격이 두 번째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푸니쿨라는 탈 때마다 즐겁다. 올라갈 때는 뒤편에서 아래쪽 풍경을 감상하며 오르는 것이 재미를 더한다. 내려갈 때는 맨 앞쪽에서 아래로 쏟아질 듯한 스릴을 느끼는 것도 좋다. 어쨌든 이런 재미를 안고 푸니쿨라에 탑승해서 베로나의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Castel San Pietro로 올랐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산 피에트로 성에서 보이는 베로나의 풍경은 매우 당연히 아름다웠다. 에디제 강을 품고 있는 도시의 모습은 평화롭지만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도시를 살아가는 수많은 표정과 감정들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리 높지 않은 층고의 건물들과 일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 지붕의 기와색들이 조화를 이뤄 유럽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고도시의 경관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했던 산 피에트로 성 위에서의 에스프레소 한 잔의 향과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성을 내려와 베로나 시내를 돌아본 후 작지만 알찬 도시 베로나를 떠나 기차를 타고 물의 도시 베니스로 향했다.  

푸니쿨라 탑승역과 레일의 모습. 
산 피에트로 성 위에서 바라본 베로나의 전경. 별생각 없이 쓱 볼 때는 도시의 전경들이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른 특성들이 보인다. 이것도 재미있는 포인트.
또 하나의 명소, 베로나 대성당. 우리가 방문했을 때 마침 누군가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삶과 함께 하는 역사적 명소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 


매거진의 이전글 Pacifico Com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