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정원
수년만에 찾은 서울일러스트레이션페어.
일찍 서둘러 간다고 했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입장도 전에 질려버렸다. 누구나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바로 이런 세상인가보다.
요즘은 뭔가 그림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그린 것 같은 몽글몽글하고 귀여운 스타일이 트렌드라고 느껴졌다. 너무도 많은 유사 그림체.
인기 작가들은 서일페에서도 꽤나 쏠쏠하게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내가 관심이 있었던 부스들은 하나같이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막 그리는 캐릭터 쪽 보다는 제대로 그린 사람의 작품을 더 선호하는 것 같고 그런 나의 취향이 반대로 시장에서 잘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술로 밥을 벌어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자기와의 싸움이다. 운이 좋아 시대의 흐름과 잘 맞으면 참 좋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의지로 되는 부분은 아니니까.
역시나 나는 본업을 놓치지 않은 채 취미생활로의 그림생활을 이어나가야겠다 싶다. 그런데도 배울 것은 넘쳐나니 먹다 체할 지경이다.
돌아오는 길에 근처 옛 회사에 들러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 따뜻한 시간들이었지만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서인지 기가 꽤나 빨리는 느낌이었다. 퇴사한지 거진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 와중에 나를 알아보고 외부인 프리패스 시켜주시는 경비 아저씨들이 반갑고 또 감사했다.
큰 회사를 다니는 직원은 받아가는 것이 많은만큼 그 이상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그 정도로 내 인생을 던질 만큼의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아마도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중간 길로 미적미적 가고 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