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nshot Feb 10. 2019

홋카이도 소도시에서 연료 소진을 경험하다

“구르마 가스 엥꼬, 헬프미”.  개발새발 니홍고로 서바이벌

"이 씨(李 氏), 어떻게 지내세요?"

어색한 번역체 문장으로 시작한 편지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 2016년 6월, 이직을 앞두고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내가 중학생일 때 이민 간 뒤 25년 넘도록 한 번도 못 본 고모를 만날 목적도 있었기에 렌터카를 빌렸다. 치토세에서 구시로, 고모가 사는 저 동쪽의 아바시리를 거쳐 후라노와 노보리베쓰까지 찍는 아주 긴 여정이었다.

4박 5일간의 이동 경로. 북해도 내구 레이스 경로라고 해도 되겠다. 동서로 긴,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여행 루트다. _ 지도 이미지 출처 Google maps


도요타의 아쿠아라는 차종을 빌렸다. 하이브리드카 운전은 처음이었는데, 실내 마감은 액센트급 정도의 저렴한 느낌이었다. 아이들링을 느낄 수 없는 게 무척 이질적이었다.

(2018년 들어 한국에서도 ‘프리우스 C’라는 이름으로 판매중)

일본에서의 운전은 두 번째였는데, 처음 경험했던 도쿄 인근의 고속도로와 같은 환경을 예상한 건 큰 착각이었다. 북해도의 고속도로는 편도 1차선인 경우도 많았고, 속도제한은 80km/h 미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위대 차량이라도 앞에 섰다 치면, 이들은 미칠듯한 준법정신으로 시속 70km 운전을 시전해 ‘칸코쿠’에서 온 성질 급한 운전자의 ‘야마’를 돌게 하기 일쑤였다. 이렇다 보니 안 그래도 따봉급인 하이브리드카의 연비는 후려 밟아도 리터당 25km 이상으로 찍혔다.

떠나기 전날, 노보리베쓰에서 숙소인 다테시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탔다. 해가 떨어지려고 했고, 급한 마음에 꽤 밟아가며 차를 몰았다. '아뿔싸...' 연료 게이지 감소 속도가 우사인 볼트급이다. 차종에 따라 연료 게이지 표기의 정확도가 눈금 레벨마다 차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딱 그 케이스인 것 같았다. 게다가 연료탱크 용량을 잘못 짐작하고 있었다. 렌트 후 4일 동안 한 번도 안 만져본 트립 미터를 건드려보니 주행 가능 거리는 30km.

60km 넘게 남은 목적지는 엄두도 못 내겠고, 가장 가까운 톨게이트로 빠져나가야 할 판이었다. 고속도로 제반 환경이 그야말로 '최소한'인 만큼, 주유소를 운영하는 휴게소는 4박 5일 내내 한두 곳 본 게 다였다.

한때 호방했던 나,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바닥을 치는 기름 게이지를 발견한 나.


며칠 동안 "우하하, 이 차는 휘발유 냄새만 맡으면 달리네"라며 까불대던 입장에서 돌변해 극강의 연비주행을 하며 전혀 계획에 없던 무로란 시 톨게이트에 내렸다. 그 옛날 동화책에서 읽었던 것처럼 저~~~~ 멀리 민가의 불빛이 보인다. 주행 가능 거리 4km. 나는 배고픈 로시난테를 탄 나그네.

하필 스마트폰의 구글 지도가 버벅대며 주유소 위치를 못 찾았다. 지도 의존을 포기하고 대충 마을 쪽으로 달렸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와중에 마을에 다다랐다. 때마침 차는 남은 오줌 한 방울을 털듯이 '부르르~' 떨면서 엔진을 세웠다. 주위를 보니 파출소라기엔 너무 조그마한, 자율방범대 사무실 같은 곳이 보였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순찰 중인지 아무도 없다.

동네를 뛰었다. 셔터를 내린 가게에 이발소 표시등이 돌고 있었다. 가정집과 함께 연결된 가게였다. 급한 마음에 불이 켜진 집의 창 밖을 서성였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뒤 맥주 한 컵을 놓고 TV를 보고 있는 삼촌뻘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실까 봐 꾸벅 머리부터 숙인 뒤 온 얼굴 근육으로 '도와줘'를 표현해 보았다.

아저씨가 창문을 여는 순간, 내가 일본어를 거의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하지만 절박한 만큼 쥐어짜 본다.

"와따시와 칸코쿠진 데쓰네. 투어리스트. 구르마 가스 엥꼬. 헬프미 플리즈"


적어놓고 보니 병맛이다. 하지만 실제로 말 해 보면 글로 쓴것 보다 더더욱 핵변태 병맛 같은 문장임을 알 수 있었다. 알아듣는 당신은 천재?

딱 저 모양새로 남의 집 창문을 두드렸다. 비가 조금 내리던 저녁 시간대였다. 폐 끼치기 싫어하는 일본인들에겐 특히 비상식적으로 느껴졌을테다. _ 거리 이미지 Google maps


아저씨는 어느덧 종이에 대고 현 위치 기준으로 주유소를 그리며 가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었다. 간혹 섞어 쓰시는 쉬운 영어단어 외에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종이에 쓰신걸 보니 얼추 '도보 10분'이라는 것 같다. 비 오는 와중에 반 벙어리 신세로 왔다 갔다 하며 기름을 사 올 자신이 없었다. 다시 한번 온 얼굴 근육으로 '나 좀 데려다줘'를 표현해 보았다. 궁즉통. 통했다.


음주 중이던 아저씨는 다른 방에 있던 아주머니께 운전을 하라고 시켰고, 그걸 얻어 타고 몇 리터의 가솔린을 사 와 다시 시동을 걸 수 있었다. 봉투에 얼마라도 넣어 드리려 하는 아내를 만류하고 번역기를 돌렸다.

"무척 감사합니다. 한국에 가면 선물을 조금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성함과 연락처를 알려주세요"

못 알아 들었지만, 부부는 일본어로 "신경 쓰지 마세요. 나머지 여행 무사히 마치세요"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의 명함을 받아온 나는 귀국한 뒤 홍삼절편과 구이 김 같은 것들을 보냈다.


한국어로 적은 편지는 일문과를 나온 친구에게 의뢰해 동봉했다. 한국에 오시면 맛있는 것 대접해드리고 싶다는 메시지와 함께.

한 달 반쯤 지났을까? 일하는 중에 EMS 소포가 있다며 전화가 왔다. 퇴근해 보니 그 아저씨, 야부시타 슈이치상이 보낸 물건이다.

꾸러미를 뜯으니 건 다시마와 마끼용 김 같은 것들이 한가득 있다. 동봉된 편지를 여는 순간, 아마도 번역기를 돌려 나온 한글을 정성껏 따라 '그린'듯 한 문장을 보며 한참을 빙긋 웃게 됐다. 일주일의 피로가 가셨다.

'네, 그러겠습니다. 대한민국에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