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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shot Jun 23. 2019

일본에서 처리해 본 접촉사고 이야기

스치기만 했는데 3시간을 써야만 했다

지난 6월 중순,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왔다. 아내와 아기를 대동했기에 종전보다 훨씬 조심해서 운전을 했다. 일본에서의 운전은 세 번째였다. 2008년 가을에 도쿄와 시즈오카 일대를 모터사이클로 여행했고, 2017년엔 홋카이도의 중부와 동부 일대를 4박 5일간 차량으로 움직였다. 우 핸들 좌측통행이지만 워낙 점잖게 운전하는 나라라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다만 도로 폭이 한국보다 좁고 습관적으로 차선의 왼쪽으로 치우치게 돼서 매번 조금의 긴장은 뒤따랐다.


접촉 사고는 삿포로 시내에서 일어났다. 구 삿포로 맥주 공장 'Sapporo Kaitakushi beer brewery' 앞이었다. 정원에 펼쳐놓은 칭기즈칸 요리 테이블에 군침을 흘리며 주차 장소를 찾고 있었다.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고기 굽는 연기와 청량해 보이는 맥주잔이 잘 어울리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오타루로 향할 계획이었다. 근처 주차장으로 진입하려는 차량들이 노견을 물고 네다섯 대 서 있었고, 나는 그 옆 차선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툭~!’


페트병 같은 걸 밟았나 했다. 왼쪽 편에서 나는 소리에 사이드미러를 보니 거울이 세팅해 놓은 것보다 아래로 쳐져있었다. 룸미러로 뒤를 보니 검은색 프리우스 운전석 밖으로 운전자가 손을 내밀고 세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뿔싸, 왼쪽으로 쏠려 운전하면서 백미러끼리 부딪혔구나’

이번에 렌트한 차량은 도요타 악시오(Axio)였는데 아반떼와 액센트 사이 정도의 크기였다. 국내에서 내가 모는 SUV에 비해 작은 차체라 부담이 없었는데, 차선 이탈 경고 장치가 달려있었다. 이틀 동안 왼쪽 차선 침범 시그널을 심심찮게 보내더니 결국 일이 벌어진 거였다.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 다가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상대방 차를 살폈다. 프리우스 오른쪽 사이드미러 거울을 둘러싼 플라스틱 테두리 3cm 정도에 금이 가 있었다. 내가 운전한 차량의 사이드미러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스치듯’ 일어난 사고였다.

경찰을 부르고 보험사에 접수해야했던 '사고'의 스케일. 5천 엔 정도 현금으로 보상할까 했었다.


그도 뒷좌석에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꼼꼼하고 깨끗하게 관리된 차량이었다. 여행객이고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고 하니 그는"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고, SIRI를 호출해 일-영 번역기를 돌렸다. 일-한 번역기를 돌릴 수도 있었겠지만, 번역 내용을 본인도 알고 싶었기에 그랬으리라. 나도 한-일 번역기를 돌려 “운전 방향이 달라서 본의 아니게 접촉하게 됐다. 미안하다. 다친 곳은 없는가”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피해가 너무나 경미했기에 아닌 줄 알면서도 예의상 내놓은 말들이었고, 길 위에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일본의 교통 문화를 모르는 내 섣부른 짐작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인 운전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경찰에 신고하는 그를 보고 ‘이런 경미한 사고에 저럴 일인가’ 의아해했고, 번역기를 돌려 “파손된 부품값을 알아봐 주실 수 없습니까? 공임과 부품값을 제가 지불하면 경찰과 보험사에 연락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상대방 운전자는 ‘뭐 이런 황당한 사람이 다 있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몇 초간 응시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혼란스럽다고 판단해 아내에게 일본 여행 시 교통사고 처리 케이스를 검색해보라고 했다. 검색 결과는 대동소이했다.


아무리 경미한 사고라도 경찰에 신고한 뒤 보험사 연락까지 진행할 것.


교통경찰을 호출하면 사고 관련 벌금이 부과되고, 보험 처리를 하면 할증이 붙게 돼 소소한 접촉 사고는 당사자끼리 해결해버리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그제야 상대방 운전자의 황당한 눈빛이 이해됐다. 바로 번역기를 돌려 “내가 지극히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제안을 한 거였고, 당신이 당황했었을 것 같다. 미안하다. 교통경찰을 부르고 서로 보험사에 접수를 하자”라고 이야기했다.


10분쯤 지나자 만화 닥터슬럼프에 나올 것 같은 작은 경차를 타고 경찰 두 명이 왔다. 50대 중후반의 남자 경찰, 오동통하고 눈이 큰 20대 중후반의 여자 경찰이었다. 그들의 모습마저 닥터슬럼프의 한 장면 같았다. 둘은 내 국제 운전 면허증과 여권, 차량 등록증 같은 것을 확인하고 사고 상황 설명을 들은 뒤 차량 곳곳을 확인했다. 동승자가 다친 곳은 없는지 물어본 뒤 상대방 운전자는 갈 길을 가라고 하고, 나는 파출소로 동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

차량도, 출동한 중년의 남자 경찰도 딱 이런 느낌. [출처. https://www.ilikesticker.com]


출동한 경찰 두 명만이 근무하는 작은 파출소에는 캠페인 포스터 몇 장과 사무용 책상, 전화기 같은 것이 단출하게 놓여있었다. 여경은 내게 면허증과 여권을 복사하겠다며 받아 들고 뒤편 공간으로 들어가 20분 가까이 머물렀다. 두 가지 서류를 ‘완벽’의 경지까지 깨끗한 퀄리티로 복사한 듯, 20분이 지나자 수십 장의 카피본을 들고 나왔는데 디테일에 굉장한 집착을 보이는 국민성이 엿보였다. 그동안 중년의 남자 경찰은 길에서 물어본 것들, 이를테면 나의 서울 주소나 여행 목적, 동승자의 이름 같은 것들을 다시 묻고 빨간 볼펜으로 서류에 기록했다. 매뉴얼형 인간이란 이렇다는 걸 보여주는 듯, 온갖 부스러기 정보들을 다 기록했을 때쯤,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또 한 번 일어났다.


한국에서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는 남자 경찰에게 “오피스 워커”라고 답했고, 이어서 회사 이름은 무엇인지, 어떤 걸 하는 기업인지 등의 질문이 뒤따랐다. 부연 설명이 귀찮았던 나는 “비즈니스 카드를 줄게”라며 명함을 내밀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남자 경찰은 “명함에 휴대폰 번호만 적혀 있는데, 자리 내선 번호가 왜 없냐?”라고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우리 회사는 대외 업무 혹은 외부와 통화할 일이 많은 직무를 가진 직원이 요청하면 내선 전화를 지급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개인 휴대전화를 쓴다. 언론 홍보 일을 할 땐 자리 번호가 있었지만, 작년에 직무 이동을 하면서 전화기를 반납했고, 내 명함엔 휴대폰 번호만 적혀있었던 것이다. 개인 모바일 번호를 프라이버시의 일부로 생각해 영업직을 제외하고는 명함에 적어두지 않는, 그리고 업무용 전화인 내선 번호와 팩스 번호 정도만 기록하는 일본인에게 내 명함은 이상하디 이상한 그런 것이었다.


“내 명함이 왜 이렇냐면, 일본의 LINE 같은 메신저 기반 플랫폼 회사거든. 그래서 어지간한 일은 메신저로 다 해. 내선 전화를 쓸 일이 없어. 필요한 사람은 신청해서 쓰는데, 난 그거 필요 없어서 안 써. 그리고 한국에선 명함에 개인 휴대폰 번호를 적는 게 흔한 일이야”

내선 번호가 없는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명함

교통사고 정리하러 온 파출소에서 교환 학생 마냥 자국의 특징적 문화를 브리핑하는 알찬 시간을 갖게 될 줄이야! 이 모든 과정이 번역기 어플을 통해 진행됐다는 것도 놀라웠다. #a.k.a_무너지는바벨탑


거의 3시간을 보낸 뒤 파출소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영어를 구사하는 경찰서 직원이었는데, 모든 조사 과정이 끝났고 상대방 운전자 측 보험사와 내 쪽 렌터카 회사에서 도쿄 마린(내 보험사)에 접수를 했다는 얘기를 해줬다. 사고 리포트를 촬영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안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상대방 운전자의 이름과 경찰관 두 명의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안된단다. 모든 게 정리됐으니 편안한 여행되시라는 말과 함께. 한치라도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할 여지는 없애고 보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사이드미러끼리 부딪혔을 때로부터 3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칭기즈칸 요리는 온데간데없고, 주린 배는 등가죽과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설령 공권력에 의지한다 해도 이런 소소한 케이스는 등 떠밀린 듯 처리했을 한국. 지극히 티끌 같은 일이지만 정해진 매뉴얼대로 로봇처럼 처리하는 일본. 둘 다 개운치 않으니 적당히 섞어놓은 하이브리드 모델은 없을까? 어쨌거나 4박 5일의 북해도 여행은 무사히 끝났다.

오타루 숙소 욕조에서 바라본 풍경. 사고 처리의 스트레스를 덜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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