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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선 Dec 15. 2022

주부가 내 꿈은 아니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비가 내렸다. 겨울은 그 비의 끝자락을 붙잡고 매섭게 다가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것은 당연한데 매 해 겨울 추위의 시작은 항상 두렵다. 불쑥 찾아온 찬 겨울이 걱정되는 마음에 목도리와 장갑을 꺼내고 두꺼운 패딩점퍼를 꺼내 아이들에게 둘러주었다. 공기가 차가운지 따뜻한지 관심조차 없는 아이는 새로 꺼낸 목도리가 마음에 드는 듯 내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9시. 하얀 털목도리를 두른 아이와 집을 나선다.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면 하원 때까지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평화로운 주부의 삶. 아이 둘 가정주부의 여유로움을 누군가는 부러워한다. 가령 남편이라던가.


사실 주부의 여유는 갖은 마음의 풍파를 겪고서야 만들어진다. 누구도 생의 처음부터 주부로 살아가진 않는다. 딸로, 친구로, 학생으로 살아가다 꿈을 키우고 이뤄간다. 열심히 노력해서 목표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라고 배운다. 나 역시 바이올리니스트나 선생님 같은 꿈을 꾸며 살았었다.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있는 나의 모습이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미래의 모습만 그리며 노력했다. 내가 상상한 나의 미래에 '주부'는 없었다.


첫 아이를 품에 안은 나이는 28. 주변에서는 애가 애를 낳았다며 '에구'하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보지 못한 미래를 주변에선 벌써 알아챘던 것일까. 주부로 살아갈 나의 앞날을. 꿈은 멈추고 경단녀로 살아갈 내 인생을.

경단녀의 인생은 조금 억울했다. 긴 시간 노력해온 나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주변에서 나에게 요구한 것들은 엄마로서의 자질, 생활력, 살림 솜씨. 집안일은 할 줄 모르고 주부의 삶엔 관심 없는 진짜 나는 꽁꽁 묻고 엄마라는 캐릭터가 불쑥 나와버렸다.

'경력단절'은 주부에게, 엄마에게 슬며시 찾아온다. 아이를 안아주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찬바람이 부는 겨울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아, 내가 주부가 되었구나.' 하며 체념하듯 깨닫게 된다.

너무나도 당연한 계절의 변화처럼 주부의 생도 멀리서 보면 당연하게 보일까. 가까이서 보면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이지만 그저 자연스러운 생의 변화일 뿐인 걸까. 내 꿈은 주부가 아니었다.


일을 할 수 없는 주부의 일상이지만 새로운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주부 8년 차. 이쯤 되니 여유가 생긴다. 인턴 주부를 끝내고 정식 주부가 된 느낌. 어설픈 엄마의 모습에서 자연스러운 주부의 모습이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걸. 조금 더 유연한 마음으로 편하게 받아들일걸 하는 후회도 있다.

경력단절. 누군가에게는 끝이고 누군가에게는 시작이다. 불쑥 찾아오는 주부의 삶을 조금은 사랑해 줄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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