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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선생님 Jan 15. 2018

관계의 법칙 : 나는 아빠를 모른다  

아빠가 울었다. 할머니가 올라오신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어릴 적, 아빠는 퇴근하시면 가끔 주머니에서 사탕 서너 알을 꺼내 주셨다. 식당 카운터에 올려진 사탕 바구니에서 한 알, 두 알, 세 알 자식들의 수만큼 살짝 손에 쥐어 자식들의 입을 채워주며 아빠는 늙어갔다. 


그런 아빠가 울었다. 시골에 혼자 계시던 할머니가 큰집으로 올라오신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구순을 훌쩍 넘긴 노인에게 치매 증세가 찾아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며느리의 얼굴을 잊으시더니 나중에는 본인이 업어 키운 손주들의 얼굴을 기억에서 지우셨다. 그 6개월간 나날이 증세가 심해지는 할머니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어느 날은 쥐를 잡겠다며 온종일 바닥을 치고 다니고, 어떤 날은 식탁에 있는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고선 배가 아파서 앓아누우셨다고 했다. 별다를 것 없는 치매 증상이었다. 아빠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빠는 매주 할머니를 보러 큰집에 갔다. 갈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이번이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할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어머니 딱 한 번만 더 봅시다! 다음 주에도 봅시다.' 했다. 어느 순간 고향도 잊어버렸던 할머니는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잊지 않은 아들을 보며 '오냐, 오냐' 하곤 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더 이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어느 금요일, 우리는 큰집으로 향했다. 아빠는 슬퍼할 시간도 없이 장례절차를 준비했다. 오래 살다 가셨으니 호상이라며, 이렇게 많은 화환이 온 걸 보면 자식을 잘 키우셨다며 덕담을 주고받는 장례식이었다. 아빠는 손님을 맞이하고 끊임없이 절을 했다. 역시 어른이구나- 싶었다.  


삼 일이 지니고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을 보는 순간 아빠가 울었다. 꺼이꺼이 운다는 표현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빠는 아들이었다. 어미를 잃고 이제 어떻게 사냐며 우는 아이였다. 


그리고 다시 6개월이 지났다. 늙은 아들은 다시 나의 아빠가 되어 일상을 산다. 가끔은 할머니가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며 투정 부리며, 덤덤하게 어른의 삶을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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