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는 순간
도로가 막히면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남짓이 걸리는 출퇴근길 700번 버스 안에서 나는 물밀듯 쏟아지는 생각들에 잠기곤 한다.
방학이 되면 감사하게도 아르바이트 자리를 내주시는 이모 덕분에 나는 퍽 편하게 사무보조 업무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그날은 아침 8시 반, 차갑고 피곤한 겨울 공기를 맞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평범한 방학의 평범한 출근길이었다. 드디어 탑승한 버스 안에서 따뜻함에 취해 피어나던 잡념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다. 그리고 그날의 감상을 세상 밖으로 토해낸다.
2020년 1월 28일의 메모. 입김이 폴폴 나는 추운 겨울날의 아침, 나는 700번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한다. 뒷자리에 앉아 고개를 젖혀 버스 안을 훑어보는데 우연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행선지는 다르지만 같은 방향으로 아침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고요하고 따뜻한 버스 안은 정식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전 사람들의 졸음과 걱정과 무기력함과 무념무상들이 뒤섞인 채 앞으로, 앞으로 흘러간다. 사람들의 뒤통수가 힘이 없어 보였다. 인간들이 만든 메커니즘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기계 같은 검정색 콩나물 대가리들이 나약하고 가련해 보였다. 이런 인간들은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낳아 가정이란 것을 꾸리기도 하며 서로 경쟁하고 이기고 돈을 받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잔다. 동물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울고 웃고 공감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이슈로 나올 때면 세상이 놀라기도 한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은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두고 두려움 속에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나도 이와 같은 사람이지만 문득 반복되는 일상과 지루함, 그리고 그 속에 간간이 얻어지는 기쁨과 행복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 공간과 내 자아의 괴리감 혹은 이질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이 반복되는 삶들이 참 무의미하다고 느껴진다. 버스 안은 저마다 가지고 있을 성격, 관계, 개인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무관심의 공간이다. 하루 중에 무심코 지나갈, 기억되지 않을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공간. 그냥 사람1들이 뒤섞인 곳. 어떤 사람은 오늘도 그저 그런 무던한 하루를 보낼 테고 어떤 사람은 하기 싫은 일을 앞두고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사연과 감정, 성격, 의견, 생각, 사상, 살아온 날들의 역사는 버스 안에서 잠식된다. 콩나물시루에 빼곡히 담긴 콩나물로 그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버스 안에서 나는 버스 안과 어울리지 않는 고뇌를 한다. 거창한 사색이 무색하게 나 또한 검정색 콩나물 대가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즈음이면 글 쓰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이 글을 마치면 난 눈을 감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 스며들어 그저 승객1로, 시민1로 일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2020년 2월 21일의 메모. 알바가 끝났다. 꽉 막힌 서울 한복판에서, 자꾸 브레이크를 밟는 700번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글을 적는다. 한 달 동안 일 했던 기억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집에 가면 저녁을 먹은 후 열두 시 즈음이면 다음날 출근을 위해 일찍 자야 했던, 돈은 벌었지만 방학과제는 미뤘던 허송세월 같은 시간들이 떠오른다. 조카라고 아르바이트비도 후하게 주시고 마지막 날이라며 송별회 겸 회도 사주신 이모, 이모부의 모습과 엄마 따라나서던 출근길도 떠오른다. 이런 기억들이, 시간들이 나중이 되면 옛날 일이 되어 '그땐 그랬었지.'라고 추억할 텐데 너무나도 생생한 현재를 살고 있는 나로선 아쉽기도, 슬프기도 하다. 무턱대고 지나가는 시간들과 사건들이 야속하다. 시간은 의식하지 않고 흘러간다. 그래서 무섭고 정 없고 두렵기도 하다. 어차피 이 버스에서 내리면 나는 이런 사뭇 진지한 성찰을 했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친구와 만나 가벼운 수다를 떨며 하루를 날려 버릴 텐데 꼭 혼자 있으면 우수에 가득 차 버린다. 지난날의 성찰과 함께 나는 머지않을 가까운 미래에 있을 걱정들을 시작한다. 그러다 버스는 연신 급정거를 하며 내 사색을 깨뜨린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야지. 오랜만에 솔직하게 글을 썼다. 각 잡고 쓰지 않는 글은 진실되게 나오는 것 같다.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700번 버스 안에서는 어김없이 상념으로 가득 찬다. 하루를 복기하며 젊음 한 자락의 흘러가는 시간을 천천히 곱씹고 소화시킨다. 잡다한 생각이 뭉게구름 피듯 눈덩이처럼 커진다. 이어폰 틈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의 멜로디와 함께 내 생각도 흘러간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진부하고 명확하지 않은 질문도 던져본다. 내 젊음의 시간을 오롯이 느낀다. 잠시 정차한 버스 안에서 정신없이 흘러갔던 내 시간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억지로 태엽을 멈추어 성찰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시간을 마련해 책상에 앉아 과제를 하듯 인위적인 시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700번 버스 안에선 일부러 분위기를 잡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짙은 생각들을 할 수 있다. 버스에서 하차하는 순간, 그 생각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저녁 메뉴 따위를 고민하겠지만 나는 버스 안의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에겐 부족한 잠을 자고 누구에겐 지루한 시간이며 누구에겐 가차 없이 버려지고 누구에겐 목적지에 빨리 도착해야 하는 전전긍긍하는 시간, 누구에겐 행복을 기다리는 시간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잠시 숨을 고르며 우스운 철학가가 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