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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틈 May 18. 2021

추석과 아빠

현재를 살아가는 순간

  올해 추석은 생애 처음으로 홀로 보낸 뜻하지 않은, 쓸쓸한 명절이었다. 졸업전시 준비로 본가 한 번을 가지 못한 채 보낸 여름이었고, 학기의 경계 없이 보낸 인고의 시간이었다. 혼자의 몫을 하는 것이 지치기도, 익숙해지기도 할 무렵 돌아올 추석에는 당연히 못 가겠거니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신이 나서 기차표를 예매하고 오랜만에 느낄 가족의 품을 기대하며 꾸역꾸역 남은 날들을 참아냈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확실한 오아시스를 상상하며 하루하루 미션을 클리어했다.


  출발하기 하루 전,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아빠가 싸웠으니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가. 오아시스가 신기루로 변했다. 집안은 냉기만 흐르고 동생은 그 사이에 끼어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따뜻하고 온기가 있는 집을 상상했는데 이건 예상 밖의 시나리오였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내가 온기를 보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한참을 고민하다, 엄마도 아빠도 와도 좋을 것 하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 탓에 결국 기차표를 취소했다. (그들이 다툰 이유는 사소한 말실수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미동 없는 일상을 보낼 생각을 하니 아쉽고 분하고 억울했다. 엄마에게도 전화를 하고 아빠에게도 전화를 했다.


  그간 부모님이 다툴 때면 나와 동생은 줄곧 엄마에게만 붙어있었다. 엄마와 사이가 안 좋을 때마다 입을 닫는 아빠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엄마에게만 위로를 건네고 엄마의 속사정만 들어줬다. 아빠는 어차피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빠는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 편하려고 지어낸 착각이자 편견이었다. 추석에 집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려 아빠에게 전화를 했을 때, '아빠 괜찮아?'라고 어설프게 안부를 물었다. 평소엔 상냥하고 다정한 아빠도 엄마와 사이가 안 좋을 땐 잔뜩 무게를 잡았기에 나는 꽤나 긴장하며 건넨 말이었다. 아빠는 봇물 터지듯 서러웠던 감정들을 내뿜었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위로와 함께 아빠의 편을 들고 모든 말에 공감의 어조로 답했다. 아빠의 의외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반가웠고 집에 갔다면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지냈을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멀리서 전화하는 이 시간이 귀하게 느껴졌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에 들어맞듯 추석 연휴가 지나기 전 그들은 화해했다. 일주일도 채 안 간 냉전은 손톱 가시만큼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나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뭐라고 해야 할까. 관계의 재정립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20년 남짓, 견고하게 자리 잡혔던 부녀의 퍼즐이 다시 맞춰진 기분이었다. 


  아빠와 통화를 끝내고선 혼자 꺼이꺼이 울었다. 이상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이내 후회와 미안함이 뒤엉킨 눈물이 터졌다. 나는 아빠를 단단히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를 잘 안다고 생각했고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심한 자식이었다. 아빠도 그저 위로받고 푸념을 하고 싶은 사람인데 아빠를 과대평가했었다. 아빠라는 프레임에 내가 인간 문제로밀(별칭)을 가둬놓고 내 맘대로 재단했던 것은 아닌가. 눈물은 나에게 기대어 준 아빠에 대한 고마움과 안쓰러움,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눈물이 되어 숙변을 해결한 듯 깔끔한 감정으로 느껴졌다. 그 날 건넸던 위로는 아빠의 자부심과 자랑, 위안이 되었다. 엄마에게도 딸들이 아빠를 위로할 줄 안다며 그렇게 자랑을 했단다. 오래된 아빠의 마음이 오랜만에 풍성해진 것 같다. 덩달아 내 마음도 포근해졌다. 아빠는 그 작은 말들에 더 크게 반응하고 더 많이 감동하며 더 깊이 위로받는 여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녀의 관계에 지각변동이 생겼다는 걸 느꼈다. 아빠가 내리는 사랑과 보호를 받아먹기만 하는 일방통행에서 이제는 그 사랑의 형태와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나도 아빠를 감싸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어린 내가 아니라 어른이 되어가는 나로. 더욱 고차원적이고 깊은 공감을, 어쩌면 애환까지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관계에도 형태가 있다. 어떤 관계는 수평선이기도, 뾰족한 삼각형이기도, 몰랑한 추상이기도 하다. 아빠와 나는 아빠라는 큰 원에 작은 나의 원이 포함된 형태였다. 이제는 안에 있던 원이 자라 견고할 것 같던 바깥 원의 가장자리를 감싼 그림이 되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우리의 형태는 이렇게 변화하였다. 그리고 어른에서 중년이 될, 중년에서 노인이 될 우리의 형태는 이보다 더 긍정적인 모습이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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