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버스가 그려진 훈장

5주 남미 탐험 — 에콰도르에서 페루로 31시간 버스

by 달해영

이번엔 정말로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든든하게 먹고 가라고 삼촌이 차려주신 아침 밥상은 제육볶음에 된장찌개. 버스에서 출출하면 먹으라고 이모가 챙겨주신 주먹밥 두 개, 마트에서 사주신 과자, 여긴 물도 다 돈이라며 쥐어주신 물 한 통, 모기에 잔뜩 물려 고생 중이니까 계속 바르라고 주신 물파스. 만난 지 이틀 된 사람들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기꺼이 베푼 마음을 가방에 차곡차곡 넣고 마침내 페루 리마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조금 이르게 도착해서 콘센트 옆에 자리 잡고 앉아 기다리다가 오후 두 시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2층 버스, 그 앞에 삼각대를 높게 세워놓고 탑승객들의 얼굴을 찍고 있는 캠코더를 보니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꽃보다 청춘에서 보던 대로 승객들의 얼굴을 찍어놓는구나. 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버스 타고 국경 넘는 경험을 이렇게 해보게 되는구나. 육로로 국경을 넘는다니!


과야킬에서 출발해 페루의 트루히요에서 에콰도르 출국 심사와 페루 입국 심사를 동시에 받은 뒤 페루의 리마로 향하는 그 버스는 장장 31시간의 여정 끝에 리마에 도착했다. 유심도 없고 로밍도 하지 않은 핸드폰은 먹통이었고 아이패드나 책도 없이 여행했는데 그 31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대부분의 시간을 자거나 창 밖을 구경하며 흘렸겠지.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세븐틴의 "지금 널 찾아가고 있어"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는 것과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출국 전 엄마가 빨래해 준 후드집업의 냄새를 계속 맡으면서 냄새가 날아가지 않기를 빌었다는 것과 옆자리 아저씨의 덩치가 너무 커서 불편했다는 것 정도다.


버스 안에서는 총 세 번의 밥을 받았다. 2층 버스와 육로로 국경을 넘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기한 일인데 차내식을 받는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웠다. 버스 안에서 밥을 줄 정도로 긴 시간을 간다는 게, 이거 정말 한국이 아니라서 가능한 거구나 싶은 사실이었다.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는 사실상 움직이는 숙소와 같다. 그래서 모두가 젖힐 수 있을 만큼 최대한으로 의자를 젖혀 누워서 이동한다. 등받이를 지나치게 많이 젖히는 건 뒷사람에 대한 매너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자란 사람이니 처음엔 내 앞사람이 너무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때의 버스 여행을 계기로, 설계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적당한 각도까지만 젖힐 수 있도록 만들었겠지 생각하면서 산다.


중간중간 다른 도시들에도 정차하던 버스에서 2층 맨 앞자리 사람들이 내렸다. 버스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저 자리에는 리마에 갈 때까지 예약자가 없다는 말에 앞으로 옮겼다. 2층의 모든 좌석을 통틀어 공간이 가장 넓은 맨 앞 좌석을 예매해야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한층 편해진 자리에 다리를 쭉 뻗고는 또 한참을 달렸다.


과야킬에서 출발할 때 혹시 모르니 1박만 예약했던 리마의 첫 숙소는 정말로 딱 그만한 값어치의 숙소였다. 매트리스 중앙이 푹 꺼져있어 편히 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루만 예약하길 잘했다 생각하면서 새로운 숙소를 예약한 뒤, 그곳의 체크인 시간이 될 때까지 다시 방수팩을 메고 거리로 나섰다. 밤부터 배가 고픈 상태로 길을 헤매다가 스타벅스에 들어가서는 과일 한 컵과 프라푸치노를 정신없이 해치웠다. 새롭게 체크인한 숙소는 들어서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침대에 깔려있는 초록색 이불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곳에 심어져 있는 나무, 숙소의 전체적인 색감이 감각적이었다.


유심을 산 뒤 한식을 함께 먹으러 가기로 한 사람들과 석양을 먼저 보러 가기로 했다. 사랑의 공원에 한국사람 여럿이 모여서 함께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봤다. 이틀 전엔 과야킬에 있던 내가, 하루 전에는 엉덩이가 아플 만큼 버스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페루에서 맞이하는 저녁이라니. 고등학생 때부터 막연히 '언젠가는 가 볼 거야' 생각했던 그곳에 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던 곳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불과 세 달 전만 해도 상상하지 않았던 미래였는데. 여권에 찍힌 출국 도장에 자동차가 그려진 게 왜 그렇게 훈장 같고 좋던지. 해무가 잘 끼는 리마의 해변에 서있으니 머리는 부스스해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내가 여기 이곳에 발 딛고 서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IMG_8263.jpg 윗줄에 있는 에콰도르 도장. 입국할 땐 비행기, 출국할 땐 자동차.


IMG_8223.jpg 마지막 만찬. 한눈에 봐도 맛있는 된장찌개
IMG_8232.JPG 사이드 밴딩이 자꾸만 바지를 요상하게 당기고 있었다. 지아언니가 줬던 긴소매티 입고 출발.
IMG_8237.jpg 이모의 마음들
IMG_8239.jpg 콘센트를 사수하라
IMG_8243.JPG 과야킬 터미널
IMG_8246.JPG 내가 타고 갈 크루즈 델 수르 2층 버스
IMG_8249.JPG 탑승 중인 승객들을 촬영하는 카메라.
IMG_8250.JPG 버스 티켓
IMG_8251.JPG 내부는 이런 좌석이다. 베개와 이불도 준다.
IMG_8254.JPG 갑자기 떨어지던 비
IMG_8257.JPG 후드집업에 남아있는 섬유유연제 냄새를 맡으면서 엄마를 그리워하기
IMG_8259.JPG 저 왼쪽에 보이는 빨간 조형물은 페루 국경에 늘 있다.
IMG_8263.jpg 일렬로 있는 심사대에서 에콰도르 출국 심사를 받고 옆으로 넘어가 페루 입국 심사를 받는다. 신기하다


IMG_8265.JPG 차내식
IMG_8266.JPG 버스에 티비도 달려있는데, 문제는 스피커로만 돼서 내가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조절할 수 없다.
IMG_8267.JPG 날이 밝고 나서 받은 간단한 아침 식사
IMG_8268.JPG 허허벌판을 쌩쌩 달린다.
IMG_8270.JPG 이건 페루의 국경 도시 트루히요에서 리마까지 가는 버스 티켓. 95솔. 한국 돈으로 대략 사만원 쯤.
IMG_8272.JPG 그냥 계속 달린다
IMG_8273.JPG 맨 앞자리로 옮겼다.
IMG_8274.JPG 앞자리는 넓은 것도 좋지만 경치를 감상하기에도 좋다.
IMG_8275.JPG 세 번째 차내식
IMG_8276.JPG 왠지 마음에 드는 이 사진
IMG_8277.JPG 드디어 표지판에 LIMA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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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 물린 무릎은 점점 더 벌겋게 부어올랐다. 이모가 준 물파스를 열심히 바르면서 버티기.
IMG_8280.JPG 가는 길은 온통 이런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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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8287.JPG 이제는 더 적을 말도 없는 허허벌판
IMG_0248.jpg 당시 메모장에 쓴 것. 출발한 지 26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196km가 남은 것임
IMG_8289.JPG 이모가 챙겨준 물 아주 선견지명이었다. 왕초보인 나는 버스 이동할 때 물을 필수로 챙겨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IMG_8303.JPG 밤 늦게 도착했던 리마의 첫 숙소.
4FC84F86-2FBA-4374-9271-FDE7D198C2FE.jpg 리마는 내가 좋아하는 도시가 될 거야! 라는 것을 강하게 예감하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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