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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이 언니 Dec 08. 2023

벽돌같은 내 노트북과 함께

매일매일 차곡차곡 쌓아올려질 거예요

아가들까지 재우고 드디어 노트북을 제대로 사용해볼 시간.

남편은 애들 재우고 뭘 쓸 것이냐 묻는데,

정해진 것이 없어도 끄적끄적 할 수 있다는 자체로 너무나 행복하다.     


드레스룸은 무척 춥고,

노트북은 사놨지만 

무얼 써볼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오랜만에 글을 쓴다는 자체로 그저 행복하니,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그저 일기를 쓰는 것이라 해도,

행복한 마음을 새록새록 솟아나게 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첫째 딸아이는 오늘 드레스룸의 구조를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며 마련한 엄마의 방이 신기한지,

자기 방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물며

엄마의 노트북으로 한글 타자도 치고,

그림판으로 그림도 그려보았다.     


딸의 나이보다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는 

이 노트북은 정말 오래전의 노트북이라

투박하고, 크다.     

그리고 벽돌처럼 아주 무겁기도 하다.     


그래서, 

아주 좋다.     


타자를 치는데, 무게감이 느껴지고,

한자 한자 꾹꾹 눌러 적으며 

소소한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크기가 큼직하니,

딸아이가 이것저것 해보기에도 좋고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한글과 워드 프로그램이 깔려있으며

인터넷도 곧잘 되니,

내게는 이보다 좋은 노트북을 없을 듯 하다.     


기계공학과 출신답게,

최신형 노트북과 패드

그리고 무선 이어폰까지 몇 개나 갖고 있는

남편은

이녀석을 보자마자 

도대체 X노트는 어느 회사의 노트북이냐며,     

정말 오래된 노트북을 샀다고 -


윙 소리 나는걸 보니,

얼마 안가서 수명을 다 할거라며

악담을 쏟아냈지만 말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정확하게는 남편의 방 책상 위에

고이 모셔져 있는 노트북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최신형 노트북이라고


도대체 중고로 또 돈을 들여서 노트북을 산 나를

당연히 이해를 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 아무리 좋은 노트북이어도

한글과 워드가 깔려있지 않은 노트북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음을 말이다.

(작가를 꿈꾸는 마누라에게 한글도 워드도 없는

최신형 노트북을 줘봤자, 헛것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노트북에게 어울리는

무선 마우스도 여간 성가신게 아니었으니,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노트북과

인연을 쌓지 못했다.      


그렇다.


나는 아주 구시대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이어폰도 남편이 물려준 무선 이어폰은 

쓰지 못한다.     


바로 꽂기만 하면 소리가 나오는 

유선 이어폰을 두고,

도대체 뭔 연결을 계속 하라그러고

전원도 한번에 켜기 어려운

무선 이어폰을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음악은 듣고 싶을 때,

바로 들어야 제맛인데!     


무선 마우스 또한 그 불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음으로 

아직까지도 유선 마우스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은

나의 마음을 잘 알아주시리라.     


오늘 벽돌처럼 묵직한 노트북과

쥐의 꼬리처럼 기다란 줄을 가진

앙증맞은 유선 마우스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순수하게 오롯이 

나 혼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      


나는 그 행복을 꼭꼭 숨겨두고

몰래 느끼고 싶어서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비밀로 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

눈치 빠른 딸아이가 하교 후, 식탁에서 간식을 먹이며

왜 마우스 포장 상자가 

식탁위에 놓여있냐고 물어보기 시작하면서

나의 행복한 비밀은 1시간도 되지 않아 발각되었다.      


이, 바보 -

노트북만 숨기면 뭐하냐고. 


그래서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딸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나의 비밀을 재빨리 누설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남편은 철없는 아내를 혼내지 않고

책상만큼 큰 마우스 패드를 선물로 가져와 주었다.     


어제 오랜만의 부부싸움으로 오래 삐져있고 싶었지만,

이렇게 자상한 남편의 마음에 감동하여

그저 고마운 나였다.      


이렇게 오늘 우리집의 화제는 드레스룸에 갑자기 생긴 엄마의 책상과

노트북이 되었고,  

쪼그마하지만 야무지게 말도 잘 하는 둘째는

자기 전에

‘엄마, 노트북이 뭐야?’

물으며 화제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게 되어버린

나의 비밀공간과 새로생긴 노트북.     


40평이나 됨짓한 이 넓은 우리집에

겨우 1평정도의 내 공간이 생겼는데

진심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글로 내리 적어나갈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살맛이 난다.     


나란 사람은 역시나

동굴 속 자신만의 영역에서

온전하게 쉴 수 있는 -

아날로그적 인간임이 틀림없다.


벽돌같은 내 노트북과 함께

이제 매일매일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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