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아프리카

by 풀 문

세상에서 가장

측은한 책상을 말하라면

다들,

대한민국 수험생의 책상이라고 하겠지만

여기,

그에 못지않게 서글픈 책상들이 있다.


마치 대한민국 입시 전쟁처럼

좁은 땅덩어리 안, 라이벌 대행사보다

조금이라도 우월한 광고 실적을 위해

매 프로젝트마다, 똥줄 타는 절박함과

죽기 살기의 각오로 임하는

대한민국 크리에이터들의 책상.


이해를 돕기 위해, 광고라는 영역을

수학이라는 학문에 빗대자면

수학은 문제를 풀면 답이 나오지만

광고는 난제를 풀고도 노답일 경우가 허다하다.


보고하고 나면 확확 바뀌는 광고주 마음과

자고 나면 휙휙 바뀌는 소비자 마음.

즉, 열길 물속은 알아도 당최 알길 없는 사람 맘속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


최상의 답이라고 자부할 만한 답을

단기간 내, 머리채 잡고 끄집어내야만 하는

초고난이도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은 답을 찾으면 보람이라도 있지,

광고는 만들어놓으면 온 천하로부터

스킵당하기 일쑤이니,


그래서일까.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직업 중 하나가 수학자이고

이직률이 가장 높은 직업 중 하나가 광고인이라는

대놓고 비참한 조사결과들이 세상천지에 널려있다.

이런저런 개무시를 당하고도

기가 막힌 거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허구한 날 날밤을 까는

대한민국 크리에이터들의 책상엔

한과 설움과 고통이

덕지덕지 묻어있을 수밖에.


여기저기 나뒹구는, 체력 연명용 영양제.

아이디어 쥐어 짜낼 때, 생명줄 과도 같은

젤리, 캐러멜, 초콜릿 등의 긴급구호 식량들.

보고 있으면 혹시 유니크한 아이디어가 나올지 몰라

여기저기서 모셔온, 별별 캐릭터 용품들.

미치게 힘들다는 걸 반증하는 듯한

과하게 긍정적인 메시지 스티커들.


고군분투의 상징물, 제작팀의 책상들 사이로

라유나가 홀로 외로이 들어선다.

터덜터덜 자신의 창가 자리로 가 노트북을 켜고

밤새 쌓인 스팸메일을 루틴처럼 지우려던 찰나,

그녀의 손이 리셋되는 듯, 잠시 멈춘다.

돌연 그 손은, 가방을 열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라유나 양쪽 귀에 급히 꽂더니, 클래식을 재생시킨다.

그녀의 최애,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연주자가 첫 소절에서 클라리넷을 '후~우'하고 불자

그제야 그녀 역시, '후~우'하며 날 숨을 뱉는다.

이어지는 자동 연결 동작으로

그녀의 최애, 유기농 녹차 티백을 꺼내

그녀의 최애, 북극곰이 그려진 하얀 머그잔을 들고

유유히 정수기로 향한다. 비록 아주 짧은 찰나이지만,

라유나의 얼굴은 넘치도록 행복해 보인다.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졸졸졸 수혈하며,

라유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누군가 내게,

왜 이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모차르트의 찐 감성을 아느냐고 물을 것이고,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본 적 있는지

그 영화 속, OST를 들은 적은 있는지

나직이 물을 것이다.

그다음엔, 찬란한 아프리카 햇살을

눈부시게 머금은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릴 스트립의 머리를 감겨주던 씬에 대해 묘사할...

가만! 나 오늘 머리 감았던가?'


갑자기 머리가 근질거리기 시작하는 찰나, 뒤에서

텀블러를 들고 있는 신입 사원이 인기척을 낸다.

"CD님, 안녕하세요."

"네... 좋은 아침!"


그의 시선이 왠지 꼬질꼬질한 자신의 머리를

빠르게 훑는 듯하여 황급히 그 자리를 뜨는 라유나.

경보 걸음으로 걷는 바람에, 넘치는 녹차물에

엄지 검지 중지까지 흥건히 데이자,

IC'아이씨'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팀원 책상 위, 어젯밤 야식과 함께 딸려온

노랑 고무줄을 발견하곤 급한 대로 머리를 묶고

의자에 푹 파묻혀, 클라리넷 협주곡의 소리를 확 키운다.


넓은 통창 밖으로 시선을 보내자, 답답한 빌딩 숲이

청쾌하고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으로 촤르르 전환된다.

바오바브나무 군락 옆으로

기린과 얼룩말 떼가 세상 편하게 걸음을 옮기고,

코끼리 대가족은 머나먼 지평선을 향해

세월아 네월아 하며 느긋이 행진 중이다.

그 위로, 검은 날개를 시원하게 펼친 독수리 한 마리가

타원, 방심원, 나선원 등 온갖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또 그 뒤로는 수십 마리의 회색 왜가리 떼가

푸른 하늘을 신나게 쪼개며 날아간다.


라유나 연출, 라유나 콘티로 생성된 아프리카 씬을 보며

라유나는 한 가지 소원을 마음속에서 빌어본다.


'딱 1년만

인간들 코빼기도 안 보이는 아프리카 초원의

한 마리 거주민이고 싶어라.'


라유나에겐 모아둔 돈도 별로 없고

집도 없고 차도 없다.

외모의 출중함도 없고

뜨겁게 만나는 남자도 없고

썸 타는 상대도 없다.

골프나 와이너리 투어, 독서 모임 같은

고고한 취미 같은 것도 없고

끈끈한 인맥 같은 것도 없다.

하다못해, 좋은 시력도 없고

야근에 유리한 강철체력도 없고

그러고 보니, 남들 다 있는

운전 면허증도 없고

심한 길치인지라 공간 지각력도 없다.

반반한 요리 솜씨도 없고

요즘엔 나이가 들어서인지 입맛조차 없다.


한 마디로 라유나에겐

별의별 게 다 없다.


그러나 그녀에겐

보통 사람들에겐 없는

이것이 있다.


어쩌면 이것이 있었기에

저렇게 많은 것들이 텅텅 비어도

무자비한 동물의 왕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또한 이것이 있었기에

그녀에게 CD 타이틀이 여태 안 떨어지고

단단히 붙어있는지 모른다.


이것은 바로

상대의 본능을 빛의 속도로 간파하는 능력.

미세한 상황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하는 능력.

허허벌판 같은 백지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순식간에 채우는 능력이다.


이 능력치가 갓 만들어낸

따끈따끈한 아프리카 대자연을 음미하며

메릴 스트립의 품위를 표절하며

유기농 녹차를 한 입 들이키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톡!'알림음에 화들짝 놀란 라유나.

이번엔 손가락에 이어, 윗입술까지 덴다. IC!!!


안녕하세요 CD님.


허팀장의 문자다.

읽었지만 씹고 싶어서, 폰에서 바로 시선을 떼어낸다.

그리고, 자신이 급 창조해 낸

아프리카에 모차르트를 잘 버무려 감상하며

조용히 이를 악문다.


"한 곡만. 끝까지. 듣자.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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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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