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종, 우세종, 독종

by 풀 문

대한 빌딩 1층 로비.


자동문 밖으로 수많은 직장인들이

거대한 영양 떼처럼 전투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 끼 먹잇감을 찾아 나설

이른바, 점심시간이 됐다는 증거.


이 엄청난 무리에 압사당하지 않고자

라유나 팀의 브레인이자, 철학관 운영자 포스를 풍기는

조용한 카피가 자신의 몸을 요리조리 피신시키고 있다.


그러나, 순발력 하난 1도 없는 그이기에

오른쪽으로 틀자, 돌진하는 한 무리와 부딪히고

또 반대쪽으로 틀자, 영락없이 또 다른 무리와

충돌하고 나서야 간신히 로비 안으로 진입한다.


이 참담한 광경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관망하다가

조용한의 어깨를 툭툭 치는 직설화법 대가이자,

SKY AD의 원픽 패셔니스타,

아트 디렉터 김이나.


"카피님~"

"어! 하이! 잠 좀 잤어?"

"눈 감았다 뜨니까 아침이요"

"난, 버스 타고 눈 감았다 뜨니까 회사더군"


이때, 열정남이자 훈남이자 만찢남인 이수호 아트와

숫기 없고 과하게 차분해 보이는 카피 한영서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온다.

"아트님! 카피님!"


조용한과 김이나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세상 가장 안쓰러운 눈웃음을 선사하며

햇병아리 같은 후배들을 맞아준다.


같은 시각, 작은 회의실 안.

라유나가 폰을 꺼내 아까 씹은 메시지를

버티고 버티다 하는 수 없이 개봉한다.

그 새, 허팀장의 메시지가 두 개 더, 불어나 있다.


CD님, 안녕하세요 (09:30분)

급하게 들어온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09:35분)

오늘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09:37분)


황소 콧김처럼 뜨겁게 데워진 한숨을 뱉는 라유나.

방전된 체력이 기껏 5% 정도쯤 충전됐을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단톡방 열기까지 뜸을 들이다가

역시나 하는 수 없이, 메시지를 전송한다.


여러분! 신규 프로젝트 발발 했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시고, 모여봅시다!


늦은 오후, 16층 기획본부 회의실

라유나의 제작팀이 허팀장으로부터 오티를 받고 있다.

허팀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은 그럭저럭 나쁘진 않지만

전략 또한 심하게 그럭저럭이라

함께 일하기엔 사실 좀 피곤한 사람이다.

그래도 라유나에겐 차라리 이런 상대가 낫다.

잔머리 안 쓰고, 뒤에서 수 쓰지 않는다.

이간계 하지 않고, 정직하며, 투명하다.

그의 부족한 점은 자신이 좀만 더 열심히 해서

메꾸면, 어떻게든 메꿔진다.


하지만 허팀장 같은 부류는

조직 전체로 보자면 극히 희귀종.

압도적인 우세종은 바로, 맹은하 같은 유형이다.


일엔 진심도 아니면서, 잔머리 굴리는 데엔 진심.

자신의 초과 근무엔 게거품, 상대의 초과 근무는 개무시.

고로 그녀가 공유하는 스케줄은 오로지

자신의 편익 중심으로 조작될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하지만, 이마저도 가뿐히 뛰어넘는 악 중의 악이 있으니

바로 1 본부 조팀장 같은 유형이다.

일도 그럭저럭 곧잘 하는 데다가,

그 자체가 활활 타오르는 욕망 덩어리인 존재.

이런 사람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기세를 잡았다 싶으면

상대의 불알부터 뜯어먹는 맹수처럼

자신에게 걸리적거리거나, 반기를 든다 싶으면

가차 없이 급소부터 공격해,

상대를 아예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뭐 암튼, 자신의 심기만이라도 편히 해준다는 명목으로

허팀장은 라유나가 인간 취급하는 동료 중의 한 명이다.

그녀의 팀원들은 어떻게 생각할 진 모르지만...


"써머리 하자면, 타깃은 MZ, 컨셉은 ‘본능의 확장’

그리고 가장 중요한! 스케줄은..."


제작팀원들, 궁금한 듯 일제히 허팀장을 쳐다보는데


" 3일 후, 1차 제안입니다."

라는 비현실적인 답이 돌아오자,

다들 '미친 거 아니야?'를 말하는 듯한 제작팀의 입모양.


말없이 물을 한 모금 마시던 조용한 카피가

포니테일로 차분히 묶은 자신의 반곱슬 머리를

쓸어내리며 입을 연다.

“전략이 '본능의 확장’인데, 글로벌 가이드라인이

끝도 없군요... 하지 말라는 게 이렇게나 많으면

이는 곧, '본능의 억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이나가 끼어든다.

"나참, 광고에도 국력이 작용한다니까..."


허팀장이 능글맞게 대꾸한다

“에이! 그 어려운 걸 해내는 게 우리 좝(job)이잖아요”


김이나, 개의치 않고 대꾸한다.

“ 제이패션이 요청한 톤 앤 매너는요? 지난번엔

경쟁사랑 대놓고 유사하게 해달래서 해줬더니

표절이니 뭐니 하면서, 10만 구독자 마케팅 유투버한테

제작물만 욕 바가지로 먹었잖아요. 이번엔 절대!..."


“이번엔 달라야지! 더 라이블리하고 센슈얼하게!

모델이 대세 아이돌인 만큼 강렬하고 비비드 한

느낌적인 느낌! 알자나~잘하잖아~ 김이나”


외래어에, 반말 퍼레이드에, 자신의 이름으로

신나게 언어유희 중인 허팀장에 불쾌해진 김이나.

그리고 그 곁엔, 전략의 부재를 통탄 중인 라유나.

그녀의 심기는 곧 그녀의 미간에

내 천(川) 자로 고스란히 새겨지는 중이다.


한 시라도 급한 마음에, 라유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의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페이퍼 퀵!!! 하게 공유해 주세요.

컨셉은 더 심화시켜 보죠”


회의실 밖으로 팀원들을 이끌며

라유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야생의 룰은

심플하다.


리더가 머뭇거리면

무리는 희생된다.


방심하지도

밍기적대지도 않는다.


그게

내 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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