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SKY AD 회의실
제이패션 글로벌 프로젝트건으로
윤시우 소속사 'THE ONE'과의 화상미팅이 잡혀있다.
제작팀과 기획팀이 일제히 썩은 얼굴로 화면에 들어와 있다.
라유나가 나란히 앉은 조용한에게 속삭인다.
"일단 시안은 다 봤을 테니까,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구"
"아니, 무슨 사전 미팅이래요.
아이돌이라고 생쇼를 다하네요.
광고 인생 15년에 하다 하다 별 걸 다 체험합니다."
잠시 후, 소속사 홍보 팀장이 화면에 뜬다.
썩은 얼굴을 빛의 속도로 정상화시키는 SKY AD멤버들.
분할된 화면 속, 형식적인 인사를 가식적으로 나눈다.
허팀장이 능수능란하게 대화의 서두를 열고,
곧장 본론으로 진입한다.
“일단, 최대한 모델 이미지에 맞게 콘티 구성했는데
촬영 관련해 우려하시는 부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허팀장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속사 팀장이 딱 잘라 말한다.
“일단, 자극적인 컨셉이나 톤은 유의해줬으면
좋겠어요. 아티스트 이미지도 있고 하니까."
'아티스트? SNS에 난해한 풍경 사진 몇 장 띡 올리고,
희한한 추상화 몇 점 띡 그려서, 네임밸류 이용해서
전시회 열고 기사 뿌리면, 개나 소나 다 아티스트게?'
라유나가 시비를 건다.
물론, 마음속으로.
게다가, 멈출 줄 모르는 그녀의 상상력은
미팅 불참자의 빈 화면을 캔버스 삼아 신나게 펼쳐진다.
먼저, 아이돌의 SNS 계정이 열리고
그 안에 해석불가의 사진 및 추상화가
포스팅되자마자, 수천수만 개의 '하트'가
1870년대 미국 캔자스 농장일대를 초토화시킨
메뚜기 떼처럼 우르르 달려와 붙는다.
라유나는, 고삐없이 날뛰는 상상을 잠시 묶어두고
상대가 기뻐할 만한 말을 재빨리 조합해 내놓는다.
"물론이죠. 아티스트의 일관된 이미지는
광고 콘텐츠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김이나도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쿨한 뉘앙스로 말한다.
“전반적으로 모델... 아! 아티스트 이미지에 맞게
시크한 느낌으로 콘티 구성했는데요.
정확히 어느 부분이 걸리시는지 말씀 주셔야..”
이때, 소속사 팀장이 또다시 말허리를 자른다.
이쯤 되면 '말허리 자르기' 상습범인 듯하다.
“감독님이요~ 아티스트가 강하게 난색을 표해서요."
예상치 못한 말에, 라유나의 목덜미가 성난 들불처럼
훨훨 타오르더니, 급기야 얼굴까지 번질 기세다.
"김감독님은 저희 컨셉에 가장 특화된 분인데.."
"네, 압니다~ 근데, 아티스트가 함께 작업하기
좀 더 편한 분을 원해서요."
"촬영 일주일 남겨놓고, 일방적인 감독 교체는
저희로선 곤란합니다."
"그럼... 이 촬영, 저희도 곤란합니다."
화상 미팅이 묘한 결말로 마무리되고,
말 자르기 장인이 퇴장하자마자,
라유나와 허팀장이 어이없는 웃음을 동시에 터트린다.
라유나의 목소리엔 분노의 핏대가 팔딱거리고
허팀장의 눈빛엔 누구라도 걸리면
당장에 아작을 낼듯한 살기가 도사린다.
"IC!!!! 빅모델 감독 지정, 왜 잠잠하나 했지."
"인기가 깡패죠. 이젠 아예 버젓이 대놓고..."
라유나의 눈은, 이미 반쯤 뒤집혀있다.
"이 짜고 치는 고스톱!! 이 망할 놈의 카르텔!!!
잘 나간다 싶음, 시너지 운운하면서
콘티 맥락 아무 상관없이, 자기들 입맛에 맞게
스탭들 픽하질 않나!!!"
허팀장의 속도, 역시 반쯤 뒤집혀있다.
"근데 이 카르텔 이란거, 어디 광고만 그런가?
딴 데도 구석구석 퍼져 있는 독거미줄 같은 거잖아요.
대행사& 후반업체, 병원& 제약사, 제조사& 유통사,
지자체& 지역언론, 공모전& 심사위원, 심지어 아파트
관리 사무소와 경비업체까지..."
라유나의 분통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솟는다.
"조용히 뒤에서 먹잇감 반띵하는 정략적 관계...
아등바등하는 잔챙이들은
목숨 걸고 사냥해도 영양가 없는 것만 주워 먹고
극소수의 귀하신 주둥아리들은
그깟 목숨 같은 거 안 걸어도
기름기 좔좔 흐르는 살코기만 쏙쏙 발라먹는
이 야비하고 드러운..."
라유나의 감정이 마치 조울증처럼, 분통에서 고통으로
격정에서 걱정으로 순식간에 전환된다.
"그나저나 아이디어부터 도와주신 김감독님한텐,
이 죽을죄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아놔!!"
라유나의 자아분열을 안쓰러워하며 허팀장이 말한다.
"휴... 맨날 중간에 낀 대행사만 양아치 소리 듣네요.
'이실직고'하시기 불편하심 제가 감독님께.."
"노노노! 발주한 사람이 도주하는 법이 어딨어요.
여기서 모른 척 꼬리 자르고 내빼면 그게 도마뱀이지,
인간이 할 짓인가요."
그날 늦은 저녁, 스카이 애드 코앞 백반집.
라유나 팀이 허기진 멘탈로, 뺑 둘러앉아 있다.
김이나의 폰에 '톡!'이 뜨자, 팀원들에게 바로 공유한다.
“소속사 수정 가이드라인 왔네요.
촬영시간은 메이크업 포함 8시간 엄수 '필히 요망'
현장에선 사인 요청 '절대 금지'
원한다면 대행사 통해 인원수 맞춰 요청 시 '일부 고려'
개인 휴대폰 사진 촬영 '절대 불가'
중복되는 제스처 '최대한 배제'
메인 키비쥬얼은 광고주와 동시에 '컨펌 필수'
불쾌지수 최대치인 김이나의 사전 브리핑에
조용한이 가지반찬을 콕콕 집으며 말한다.
"아주 그냥, 가지! 가지! 하고들 있네.“
한영서도 된장찌개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한다.
"이런, 된장!!! 찌개"
이수호는 산채 비빔밥 위에서 참기름 통을 움켜쥐고
손을 바들바들 떠는 시늉을 한다.
"참기름 뚜껑 막~ 열릴라고 하네요"
김이나의 휴대폰이 한번 더 울린다.
“아! 피디님한테서도 문자 왔어요.
다음 주 금요일 아침 9시, 윤시우 도착 전
윤시우 대역 모델이랑 리허설 완벽히 해둬야
실제 촬영 시간 1분 1초라도 세이브 되니까
이차 저차 삼차해서, 스태프 콜타임은
새벽 6시 되겠다고 하십니다."
분노의 도가니 속, 조영한의 한 줄 평이 조용히 흐른다.
"윤시우를 향한, 차감독의
무한 배려와 사랑이 이제 막 시작되려나 보군"
광분한 팀원들을 향해 차분한 톤으로
라유나가 의미심장한 클로징 멘트를 던진다.
"상황이야 더럽든 치사하든 쪼잔하든 간에,
우린 우리 방식의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후회 없이! 미련 없이! 뒤끝 없이!
밥 먹고 후식은 요 앞 편의점에서
엿! 같은 걸로다가..."
쿰쿰한 상황 속, 라유나의 상큼한 욕설에
팀원들은 묘한 페이소스를 느끼며
자신 앞의 먹잇감에, 새끼 맹수들처럼 달려든다.
자신의 역할도 존재감도
유난히 최소한으로 쪼그라드는
빅모델 촬영
라유나의 얼굴엔 벌써,
A부터 Z까지의 궁상맞은 걱정들로
엷은 그늘이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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