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고 태클도 많았던
제이패션 촬영 현장이 밝았다.
SKY AD의 라유나 팀, 허팀장 팀을 필두로
제이패션의 마케팅 팀, 영업 팀, 브랜드 전략실,
디자인실 등 사내 체육대회를 방불케 하는 총출동과
모델 에이전시 및 윤기우 소속사 관계자 등으로
세트장은 마치 5일장처럼, 미어터지기 직전이다.
한편, 김이나와 소속사 팀장 사이에는
시베리아 고기압과 난기류가 충돌하면서
강력한 한랭전선이 형성되는 듯
어째 분위기가 싸하다.
"저희가 제안한 세트장 컬러, 맞습니다!
촬영장 조명이 밝아서 다르게 보이는 거구요.
곧 슛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색 수정은 곤란하죠.
세트장이 무슨 도화지도 아니고!"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었지만,
김이나는 마지막 문장만 꿀꺽 삼켰다.
듣고 있던 소속사 팀장, 습관성 말 자르기에
덤으로 짜증까지 넉넉히 얹혀준다.
"나참... 눈 있으면 보세요.
톤 앤 매너가 완전 딴판이잖아요.
차가운 채도는 아티스트한테 안 받는다니까.
우리 아티스트는 이미지 자체가
웜(warm)이라고요. 웜! 웜!! “
멀찍이서 이 모든 상황을 관전 중이던 조영한,
솟구치는 한 줄 평을 팀원들에게 공유한다.
"웜? 워매...
저것은 집요함 일까, 아님 민폐 일까.
그들은 아티스트 일까, 아님 테러리스트 일까."
이때, 의상을 양손에 들고 있던 스타일리스트 마저
소속사 팀장 옆에 착 달라붙어, 호들갑을 떤다.
"네? 세트색 바꾼다고요? 그럼 스타일 세팅
싹 다 바꿔야 하는데... 아놔!! 바꿔요? 말아요?
디테일 쫌만 떨어졌다간
스타일리스트가 윤시우 안티 아니냐며
팬들 눈 부라리고 집단 테러하는 거 아시죠?! "
소속사의 저차원적인 갑질에 참다못한 김이나.
라유나에게 SOS신호를 보내자,
이런 일은 수도 없이 겪어본 듯 고상한 어조로 말한다.
"아! 세트장 컬러가 좀 달라 보이세요?
그때 보신 채도로 후반 2D작업할 때 보정할 거니까
심려 마세요. 그게 저희 좝(job)이잖아요. "
"켁!"
그 옆에서 촬영장의 꽃이자 백미인
독특한 외국 과자, 갓 만든 분식, 골라먹는 컵 과일,
취향 존중별 음료 등의 버라이어티한 먹거리를
입에 쉼 없이 집어넣던 허팀장.
라유나 입에서 튀어나온, 본인의 십팔번 멘트에
꼴좋게 사레가 들린 모양이다.
첫 씬의 타임 테이블을 훌쩍 넘긴
아침 9시 30분.
완벽히 유지하고 있던,
라유나의 고상함에 실금이 쩌억 쩌억 가고 있다.
"아니, 무슨 메이크업을 한 시간 반이나 하죠?
이 상태론 저희, 스케줄 안에 절대 못 끝내니까
시간을 늘리든 돌리든 쪼개든! 알아서들 하세요! “
애꿎은 모델 에이전시가 급수습에 나선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난감하네요. 아침이라 아직
아티스트 얼굴 붓기가 안 빠졌다고...
최대한 오버 타임 벌어볼게요."
고대 문명 암호를 해독한
고고학자의 쾌감이 바로 이런 것일까?
연예계 암호를 눈앞에서 풀어낸 파파라치처럼
이수호가 조용히 팀원들 사이를 파고든다.
"제가 스테파니 인스타 팔로잉하거든요.
근데 어젯밤 자정 즈음, 사진 하나가 포스팅되더니
빛의 속도로 순삭 된 거 있죠!
그 사진이 뭐게요?"
야생 부엉이들처럼 팀원들 눈이
어둠 속 호기심에 번뜩이며 발광하자,
연이어 새로운 기밀을 흘리는 이수호.
"윤시우, 스테파니, 김하나, 제론... 요즘 핫한 애들
밍글링하면서 막~친분과시하면서, 비버리힐즈 홈파티
분위기 막~내면서... 대략 아시죠? 무슨 분위기인 줄"
이수호가 발행한 따끈따끈한 가십을 갓 접수한 조영한,
별안간 100세 어르신처럼 엄하게 호통을 친다.
"뭬야! 밤중까지 잔칫상 벌여놓고선, 이튿날 촬영장에
하마 엉덩이처럼 퍼진 면상을 감히 들이대?
그러고도 6억을 날름하다니,
어허! 짐승만도 못하도다!"
이에 한영서는, 이 시대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래퍼처럼
대한민국 청년들의 갓생을 상징하는 자신의 처지를
논스톱으로 읊어댄다.
"윤시우랑 저랑 동갑인 거 아시죠?
97년생, 소띠
쟨 소속사 떼주고 최소 3분의 1만 받아도
8시간 일하고 2억.
전 매일 소처럼, 8시간에서 플러스 알파로 일하고
최소 수면, 최소 식대, 최소 쇼핑,
최소 교통비, 최소 문화생활로 살았는데,
엊그제 학자금 간신히 갚고, 전세 대출 2억 남았다죠."
덩달아 급우울해진 이수호, 갑자기 또 무슨 생각이
떠오른 건지 특유의 맑고 희망찬 얼굴로 돌변한다.
"맞다! 저희 곧, 연봉협상 시즌이죠. 이번엔 제발!"
소속사의 모닝 갑질에서 서서히 회복 중이던 김이나.
강렬한 메탈 피어싱으로 잔뜩 치장된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후배들 훈계에 발 벗고 나선다.
.
"연! 연달아 올해도
봉! 직장인은 봉이다~라는 뜻
아직도 눈치 못 챘나 본 데, 연봉이란 건 말이야.
협상하는 게 아니에요. 통보받는 거지."
조영한 또한, 가슴에 팔짱을 끼며 달관한 듯 입을 연다.
"맨 앞자리 딱 한 번 달라졌어. 10년 동안. 내 연봉.
인류가 '절망'이란 걸 하기 시작한 건,
아마, 이 단어를 알고부터였을 거야.
"뭔데요. 그게?"
이수호가 크고 건실한 눈을 꿈뻑꿈뻑 거리며 묻자,
"희. 망."
이라는 두 글자를 퉤액! 하고 뱉는 조영한.
말 그대로 절망적인 답에,
한숨을 바닥에 내리꽂는 이수호와 한영서.
바로 그때, 촬영장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촬영장 뒤쪽,
모델 대기실 문이 열리고
붓기를 감쪽같이 가라앉힌 얼굴로
윤시우, 아! 아티스트가
유려하고 매끈하게 걸어 나오고 있다.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핥아줄
카메라와
스포트 라이트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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