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굴에 들어서다

by 풀 문

이른 아침,

스카이 애드

16층 기획 본부 회의실


유리창엔 빗방울들이 맺혀

인근의 짝을 끌어당겨 주르륵 흐르기를

반복하고 있다.


테이블 위엔 커피, 간단한 간식,

대 여섯 개의 브리프가 놓여져 있다.

회의실엔 여시, 맹은하 팀장을 비롯한 기획 팀원들과

라유나를 비롯한 제작팀원들이 마주 보며 앉아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 회의실 모니터엔

<와일드 게임 시즌3 옥외 캠페인>

이라는 프로젝트명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여시의 기획서 공유


시장 현황, 타겟 분석, 경쟁사 동향 등

형식적인 페이지들을 후루룩 훑더니

시작한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시즌3가 오가닉 바이럴 되도록!>이라는

최종 미션 장표에 종착한다.

워터풀의 유아 풀장 마냥, 얕은 깊이의 기획서에

제작팀은 단체로 어안이 벙벙하다.


그 와중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이어가는 여시.

"요즘 시대 옥외는 ‘big’ 하다고 되는 게 아니죠.

사람들이 스스로 사진 찍고, 업뤄드(upload) 하고

해쉬택(hashtag)달고, 스토뤼(story)를

자발적으로 만들어야 해요.

올개닉 바이뤌(organic viral) 되게!

1,2편을 뛰어넘는 기대감 빡 들게!

이 2개가 광고주가 던져 준 미션이에요"


맹은하는 해외파다.

그 점을 늘 상대에게 상기시키려는 듯

영단어를 문장 속에 필요 이상으로 섞거나,

필요 이상으로 발음을 돌돌 마는 경향이 있다.

근데 꼭, 토종 은어나 비속어가 하나씩 튀어 나온다.

아마 이것은, 여시의 무의식 영역과 관련있는 듯 한데

역시 사람이건 동물이건 간에

본성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게 아니다.


조영한이 푸념을 조물조물 버무려 말한다.

올개닉부터 오가닉으로 구수하게 정정 발음하면서.

“오가닉, 올해의 핫 키워드네요. 매해 트렌드 발표 보면,

전년도 단어 살~짝 튜닝해서 말하는 거 같지 않아요?

연초에 떠들고 책내고 이슈화하면

기업들 다 그쪽으로 우르르르....

또 신박한 단어 만들어 방사하면

오리 새끼들 마냥 또 그쪽으로 우르르르...

요 트렌드라는 거, 매해 어딘가에서

메이킹되고 있다는 의혹이 강렬하게 든단 말이죠..."


시뻘건 립스틱 효과가 배가된 을씨년스러운 썩소를

조영한에게 날리는 맹은하.

"그거, 주제에서 벗어나는 얘기 아닌가요?"


별 것도 아닌 일로 냉랭해진 분위기.

알고 보면 회사도,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

애들이라도 보면, 가히 한심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이럴 땐, 리더 라유나가 나서는 것 말곤

달리 방도가 없다.


"오가닉 바이럴이면... 일단 소비자들이 너도 나도

참여하게끔 후킹 하는 게 포인트 일 듯요.

그 후에, 소셜 계정에 여기저기서 업뤄드(upload)하면

아! 나도 그거 봤어! 하게끔 말이죠."


라유나의 시의적절한 성대모사로

여시의 심기가 불편한 듯 보이자,

총명한 이수호가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반대로 안 본 사람들은, 소외감 들게 하는 거고요! "


웬만해선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한영서가

어떤 영감을 받은 건지, 백 만년 만에 입을 연다.

"광고로 왕따 시키자...인 거네요"


김이나 또한 늘 열던 입을 이번에도 활짝 연다.

"어? 이거 뭔가 우리 팀 얘기 아님?

딴 팀이랑 교류 없지, 사내 동호회 활동 일절 없지,

뱃길 따라 2백 리 동떨어진 회의실 섬에

콕 박혀 사는 비타민 D결핍체! "


라유나, 실눈으로 김이나를 째려보며

회의를 급마무리한다.

이번 프로젝트도 언제나처럼 역시나

전략이 없는 관계로, 시간이 없다.


"그럼 일단 큰 방향성은 정리된 것 같고…

수호는 오늘 중으로 옥외광고 레퍼런스 수집 좀 후다닥! ”


이수호가, 자신의 신체 일부인 비니를 쓰다듬으며 답한다.

"옙! CD님"



그로부터 며칠 후,

스카이 애드의 늦은 밤


23층 사무실엔 대부분 불이 꺼지고,

라유나의 자리에만 노트북 불빛이 발광하고 있다.

그녀의 귀엔 늘 그렇듯,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 있다.

드보르자크 ‘신세계로부터’ 교향곡 9번 2악장,

Largo 현악 버전이

프로젝트만 시작하면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라유나의 불안감을 가까스로 잠재우고 있다.


이 때, 다른 제작팀에 들른 후 잽싸게 퇴근하려던 맹은하.

밤늦도록 소처럼 일하는 라유나를 발견하고선

흡족한 주인의 미소를 띠며 다가온다.


“어머, CD님, 아직 안 가셨네요”

“크리에이티브 정리가 아직 뾰족하지 않아서요.”


라유나 의자 등 뒤로 슬그머니 걸어 들어오는 여시.

“참! 이번 프로줵(project)이요.

전무님이 관심을 보이시네요.
자제분이 와열드(wild) 게임 빅팬이라나 뭐라나...

CD님이나 저나, 살짝 피곤하게 됐지만

같이 시널지(synergy)내봐요.

어차피 죽 쑤면 다 우리 탓이잖아요"


모니터에 시선을 못 박은 채, 라유나가 말한다.

“경쟁 피티도 아니고, 현업 나부랭이에

전무님이 관여를요? 의외네요.”


그러자 여시는, 라유나 등 뒤로 바짝 밀착하며 속닥거린다
“저도 몰랐는데, 게임사 대표가

저희 사장님이랑 지인이래요.

이번 프로줵 엄청 중요하다고 엊그제 사장님한테

다이뤡(direct)으로 컬(call)하신 모양이고요.

전무님이 딱! 그 냄새를 맡은 거죠. 후각 장난 아니잖아요.

암튼 이번 건만 어떻게 잘되면

빌빌대던 우리 팀이랑 CD님 팀이랑

힘빨 딱 받고 아주 그냥!

윈윈 아시잖아요? CD님 "


'후각에 시각, 청각, 촉각까지 풀패키지로 장착한

여시께서 어따 대고 사돈 남 말?'

라유나가 응수한다. 물론 속으로...


무슨 긍정적인 뇌회로를 돌린 건지

입꼬리를 사선으로 그어 올리며 멀어져 가는 여시.

라유나의 눈동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가다가

노트북으로 다시 빠르게 복귀한다.

복잡한 심경이 눈빛으로 맺힌다.


'아...전무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자칫 틀어질 수도 있겠는데... '



여시의 하이힐 소리에

라유나의 타이핑 소리가 더해져

스카이 애드의 늦은 밤, 불길한 합주가 울려 퍼진다.



또각......또각.......


타닥......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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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자크 ‘신세계로부터’

#교향곡 9번 2악장, Largo 현악 버전

#감상 중 뭔가 했더니 #맹은하 있던 자리 #한 올의 흔적

#주인 찾아줘?말어? #DNA감식_들어가? 말아?

#은근 반곱슬 #뿌리 매직할때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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