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가 만든 자리

반복이 당연함이 될 때

by 예담


배려는 언제부터 당연함이 되는 것일까.

더 이상 배려로 불리지 않는 순간은 반복에서 시작된다.


“물이 한잔 생각나네.”

그 말을 나는 흘려듣지 못했다.

대답 대신 몸이 먼저 움직였다.

건네는 물 한 잔은 사소했지만, 그런 장면이 쌓이면서 나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족 사이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는 말로만 하고, 누군가는 그 말을 채워준다.

처음에는 배려였다.

그러나 반복은 역할을 만들고, 역할은 기대를 낳는다.

기대는 곧 당연함이 된다.


나는 그것이 가족의 화목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다.

챙겨줄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했다.

관계에 기여하고 있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고마움이 사라진 자리에서

이유 모를 피로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Alfred Adler의 목적론은 말한다.

응석 부리는 아이 뒤에는 그것을 받아주는 어른이 있다고.

그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깨달았다.

지금의 구조는 어느 한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내가 반복해 온 선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배려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움직이던 나를 멈추는 일.

그것이 관계를 다시 세우는 시작일지 모른다.


변화에는 힘이 든다.

상대의 표정이 달라질 수도 있고,

짧은 긴장이 스칠 수도 있다.

그러나 감사함과 존중 없는 화목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제는 먼저 일어나지 않으려 한다.

부탁이 있다면 생각해 보고 돕고,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다.


배려는 선택일 때만 배려로 남는다.

그 선택권을 되찾는 일,

그 자리를 다시 정하는 일은

어쩌면 나를 존중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