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랑 언니는 뭐야.
내 이름과 언니의 이름은 거의 동일하다. 부모님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은 나와 언니의 이름을 구분 지어 부르려고 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사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입에서 소리 나는 대로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어떤 불만도 제기하지 않고, 뉘앙스로다가 알아먹고 반응한다.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다. 부르는 이유가 대체로 인구통계학에 따른 -성별과 나이 그리고 직업- 질문을 하기 위함이거나, 일을 시키기 위함이기에 특정인을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단지, 최대한 먼저 반응 안 해야지 마음먹을 뿐이다. 그러나 자주 부름에 응하는 건 나다. 그는 어떻게 반응을 안 할 수가 있을까. 743일을 더 살아온 언니의 이름이 더 많은 빈도로 불리는데, 놀라운 일이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의 이름이 정확히 부릴 때가 있는데, 그건 혼을 내기 위해 호명된 것이니 슬퍼해도 좋다. 어머니, 제 이름을 부르지 마오.
내 이름은 경린, 언니의 이름은 형린. 모음 한 자만 다른, 누가 봐도 혈연이다. 성씨까지 포함시키면, 곽형린과 곽경린으로 누가 봐도 형제구나 알 수 있는 정보적 이름의 소유자이다. 심지어, 이름에 '형'자 들어가는 이유로 모두들 그가 손윗사람임을 때려 맞춘다. 그러나 그는 형이 아니라 언니다.
아무튼 거의 동일한 이름을 가진 우리에게는 이름에 관한 놀랄만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이 탓에 크게 두 번 놀랐는데, 첫 번째는 언니와 나의 ‘린’ 자의 한자가 다르다는 거였다. 나는 맑은 린 자를 쓰는데, 언니는 기린 린자를 썼다. 기린 린은 뭐야. 상상의 동물이 되어라? 언니는 이름 뜻을 설명하지 못했고, 부모님도 설명하지 못했다. 한자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언어임으로 본인이 짓도록 하자.
그다음으로 놀란 사실은 우리의 ‘린’ 자가 돌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 이시죠? 어머니? 나는 생각에서 극존칭을 쓸 정도로 놀라버렸다. 누가 봐도, 누가 들어도 돌림자인데... 페이크였다니? 집 안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만 같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첫 번째 깨달음과 두 번째 깨달음 사이의 10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는 거다. '돌림자에 한자 다르게 써도 되나 보다. 역시 특이한 이름!'하고 넘어갔었는데, '린'자가 돌림자가 아니라니... 스물다섯의 경린은 기절초풍했다.
여자는 항렬이 없어
그 단호한 말에 나는 순풍산부인과의 정배처럼 이마를 턱- 칠 수밖에 없었다. 족보에도 안 올라가는 계집애한테 줄 항렬이 어디 있겠는가? 맙소사.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유교걸 자격미달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가. 내가 강릉 함 씨 32대손인 함필규도 아니고. 대가 끊기던 말건 나와는 하나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크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당연히 배우던 상식에서 '내'가 제외될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한국의 전통이고, 나도 성씨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 족보의 서열체계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
충격적인 사실에 언니한테 달려가 당신은 언제 빨간약을 먹고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는지 털어놓으라고 육갑을 떨었다. 언니는 태연하게, '난 초등학교 때 알았는데?'말해서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항렬을 배우던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돌림자 쓰는 사람 손 들어보라는 말에 번쩍 손을 들었는데, 보통 여자는 돌림자를 쓰지 않는다며 손을 내리라고 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말은 들은 언니는 '지가 뭔데;;;'라고 생각하고 선생님을 싫어했다고 했다. 성격 뭐야.
엄마도 알고, 언니도 알고, 선생님도 알던 상식을 나만 몰랐다. 사실을 깨닫고 나니,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뭔데." 네의 대상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는 계속 "네가 뭔데 뭔데"했다. 항렬을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물론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빼앗긴 기분이었다. 가부장제가 나의 돌림자를 수탈했다. 되찾으려면, 언니와 함께 성전환 수술을 해서, 항렬에 맞게 이름을 개명을 해서, 곽 씨 손을 부활시키면 되는 건가. 이게 무슨 일이지. 내 손을 부여잡으며 '네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든든하고 좋았을 텐데-'하는 친할머니도 뒷목 잡고 쓰러질 배드 엔딩인데? 남자 DNA로는 조상 찾을 수도 없다는데, 영화 <루시> 나 볼까. 내 친구가 ‘난 사실 외계인이야.’라고 말을 했는데, 그게 진짜일 때의 기분이 이럴까? 어쩔 수 없다. 친구가 외계인이면 외계인으로 존중해줘야 하고, 곽 씨의 대는 끊겼으니 이제 '남자니 항렬이니'하는 걸 멈출 시간이 왔다.
친구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를 포함해 여자 사촌 4명이 다 은자 돌림을 쓰고 있지만, 항렬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근본 없이 살자!" 그래, 족보 없이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