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집을 위한 플레이리스트

혹은 설계자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by 문영
플레이리스트.jpg

나는 어떤 건축주일까? 때로는 새벽까지 자신의 휴식 시간을 들여 내 집을 함께 고민하는 그들에게 말이다. 여전히 탈피하지 못한 나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여러 중대한 결정을 최대한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는 것이 미덕인 집 설계 과정에서 다시금 소환되었다.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신경쓰는 지금 상황은, 남이 요청한 일만 하며 살아온 디자이너에게는 아주 호사스럽다 못해 사치스럽고 송구스럽기까지한 경험이다. 지은 죄가 없음에도 그들에게 자꾸만 미안한 기분이 드는 까닭은, 비슷한 일을 생업으로 하는 내게 그들의 입장을 자꾸만 대입해보는 습관 때문일 것이다.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요구사항을 전하는 방식은 표준화된 것이 없으니, 우리 건축가 선생님들은 그간 천차만별의 요청서를 받아왔을 것임이 틀림없다. 요청’서’였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않았을까. 설계 계약을 며칠 앞두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정리해서 주는 게 좋은지 포맷을 요청하려다, ‘난 디자이너니까 이런 건 알아서 잘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영혼 속 요구사항까지 총망라한 문서를 전달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우리 개들은 어떤 개들이고, 왜 서울에 못 살겠고, 왜 우리 집엔 계단이 없어야 하고, 난 이 집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등.


그러나 기록을 더듬어 보니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1년도 더 전부터 나는 “이런 집을 원한다”며 이 소장님을 붙잡고 이런저런 단상과 사진 쪼가리들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화해서 말하자면 ‘충분한 밑작업’이 이런 마법 같은 설계에 쬐금은 기여했다 봐줄 수도 있지만, 수식을 덜어내면 그저 진상짓이 따로 없어 뒤늦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려드는 지점이다.


건축가. 슬쩍 본 바로는 이만한 극한 직업이 또 없다. 우리가 머리가 듬성듬성 하얗게 센 은발의 건축가들을 유난히 자주 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함께하는 세 분은 아직까진 은발이 아니라 다행이다. 언젠가 배우 김영광이 건축가를 연기한 넷플릭스 시리즈 <썸바디>를 보고 이 소장님은 이런 내용의 감상을 전하였다.


“설정 오류다. 저렇게 연쇄 살인하고 돌아다닐 만큼 한가한 건축가는 없다.”


컴퓨터 하나로 나 혼자 완성할 수 있는 나의 일과 달리, 그들의 일은 너무도 변수가 많아 보인다. 건축에서의 사고는 편집 디자인에서의 인쇄 사고와는 비교하기 힘든 규모일테고. 마주쳐서 말을 섞어야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수포자에 셈도 잘 못 하지만, 성정이 까칠하고 화가 많은 나 같은 사람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직업이다.


그들의 일이 조금이라도 덜 고되길 바랐다. 텍스트가 아닌 감각으로 집의 ‘분위기’를 공유할 수는 없을까. 영화 한 편을 정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수십 가지 요구사항 속에 부록으로 쉬어가는 코너를 하나 만들었다. <집을 위한 플레이리스트>가 그것이다. 건축에도 시퀀스가 있다는데, 이 집 안에서 벌어질 내 일상 시퀀스를 상상하며 고른 곡들.


시골살이는 결코 단조롭지 않다. 지평에서 내 시퀀스는 몹시 무질서했다. 도시 한복판에서보다 감각이 날카로워져 다 부숴버리도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만 보고도 우주를 느끼며 벅차오르는 순간도 있다. 며칠을 씻지 않고 떡진 머리로 새벽까지 일을 하기도, 어떨땐 한량처럼 가득한 볕 아래서 <리틀 포레스트>를 찍고 있기도. 집안에서 왕거미를 마주쳐 공포의 비명을 지르기도 하지만, 16기 상철의 명언처럼 ‘얘네한테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생명존중 가치를 되새기며 고개를 숙이기도. 이 집에서 마냥 행복하리라 믿지 않기에 희로애락의 멜로디를 리스트로 만들었다. 기쁨에 호응하고, 절망의 수용을 돕고, 집의 미쟝센을 완성하는 음악들.


가장 잘 선곡했다 싶은 곡은 첫 곡이다. 도입부가 늘 압도적인 영화를 만드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 <I Am Love>의 인트로곡 ‘The Chairman Dances’다. 특히 애정이 가는 이유는 첫 미팅, 두 번째 미팅에서 점차 구체화된 집의 모습을 입구부터 내부까지 구경할 때 머릿속에서 이 음악이 자연스레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투어 영상을 만들어 BGM으로 깔고 싶을 지경이다.


미래에 집을 지을 분들이 있다면 설계자를 위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보시길 추천한다. 반드시 플러스 요인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마이너스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Playlist on Youtube 집을 위한 플레이리스트

keyword
작가의 이전글끝집일기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