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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집일기의 시작

끝사랑보다 끝집

by 문영
Screen Shot 2023-11-12 at 8.37.52 PM.jpg 집을 짓고 이사 오면 매일 개들과 함께 산책하게 될 참나무 숲


1년 전, 처음 이 동네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날도 짬을 내어 가평을 찾아 부동산에서 알려준 매물을 임장하던 날이다. 그쯤 되니 땅 찾기는 막연히 운명의 짝을 기다리는 것과 비슷했다. 여느 때처럼 역시나 느낌이 오는 집터가 없어 가평 지리나 열심히 공부하고, 오색찬란 가을 산이나 실컷 눈에 담고 집으로 가는 길.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드라이브하고 싶어 우연히 이 동네에 들어섰다.


다른 동네와 다르게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나무 떼의 환대. 빼곡한 주택 단지 대신 느닷없이 펼쳐지는 드넓은 녹지들. 아, 이 녹색의 썰렁함과 황량함. 등 털이 바짝 서고 머릿속에 느낌표가 열 개 찍혔다. ‘여기로구나!’


“집보다 주변 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시골에 살아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집은 내 마음대로 지어도, 이웃과 동네는 돈으로도 바꿀 수 없다. 운동 다녀오는 길에, 마트 다녀오는 길에, 산책 오가는 길에 매일 보는 풍경은 너무나 중요하다.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화도 풀리게 한다.


이 동네에 붉은 핀을 꼽고, 무조건 여기서 땅을 찾기로 했다. ‘동네를 먼저 정하라’는 집터 찾기의 국룰을 따르게 됐다는 안도감은 있었지만, 이 동네는 어딘가 미스테리한 구석이 있었다. 주택 건축에 적절한 평수의 매물이 달랑 2개뿐이었다. 원하는 조건에 맞지도 않고 예산도 훌쩍 초과했다. 강건넛마을, 산건넛마을 부동산까지 모조리 수소문했지만 “그 동네는 매물이 없어요”가 공통된 답. 이유는 불분명하나, 전형적인 원주민 마을로 외지인에게 인기 있는 마을이 아니기 때문인듯.


원하는 조건의 토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마음은 꽤 힘들다. 나처럼 원하는 조건이 구체적이고 까다로운 경우에는 좌절감까지 느낀다. 다 맘에 드는데 머리맡에 송전탑이 떡하니 있거나, 근저당이 왕창 끼어있거나, 땅 주인님이 돈을 갚지 못해 곧 경매에 올라갈 예정이거나, 도로가 없거나. 그쯤 되면 자책이 시작된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가? 적당히 타협해야 하나?’


중간중간 더 싸고, 토목 공사도 완벽히 된 다른 동네 매물의 유혹이 계속 이어졌다. 가장 마지막 유혹은, 신화 김동완 님의 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땅이었다. 눈이 탁 트이는 환상의 산세 뷰를 지닌 좋은 기운의 마을이었지만, 동네에 밤나무가 어찌나 많은지. 가을에 밤은 실컷 먹겠지만, 개들 발바닥에 밤 가시가 박힐 것이 두려웠다. 부동산 사장님의 친절한 투어에 대한 감사 인사를 마치고 마을을 떠나는데, 유튜브에서 본 김동완님의 카키색 투도어 랭글러가 마을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최근 가평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좌절만 이어지던 어느 날, 낯선 부동산 사이트에서 이 동네 땅 하나를 발견했다. 국유림이 접했는데 정남향까지? 역시나 예산은 초과했지만, 조정해 볼 마음으로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땅 주인과 연락이 안 된다는 거다. 이번에도 운명이 아닌가 싶어 개들을 데리고 구경이나 가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마을 어르신을 마주쳤다. 누가 봐도 외지인 티가 나는 나를 힐끗 바라보는 어르신과, 질문이 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눈치만 보는 나 사이에 묘한 아이컨택이 몇 초간 이어졌다. 살짝 늦은 엇박자 용기가 났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땅 주인이세요?”

“아니요. 근데 땅 주인하고는 친해요.”


조계사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인 이웃집 정 선생님과의 첫 대화. 그로부터 1년 뒤, (1년이나 걸렸다니) 이 동네 토지의 등기 권리증을 손에 쥐었다. 땅을 결정한 후에도 좌절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장, 반장님보다 영향력 있는 마을 대장 정 선생님과의 인연 덕에 부동산에서도 혀를 내두르며 포기하라던 이 어려운 땅을 손에 넣었다. 귀여운 앞집 개들은 덤이다.


머리에서 넘쳐흐르는 집에 대한 에피소드들. 기억 저편으로 휘발되기 전에 그릇에 담아야겠다. 그릇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 바이아키텍쳐에 처음 보냈던 요청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나의 초심이 꾹꾹 눌러 담겨 있는 문서. 그 문서는 같은 집에 50년 이상 살고 있는 디터 람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사가 잦아 한 번도 마음과 짐을 풀어놓고 살 수 없었던 과거에 대한 애환과, 내 삶에 더 이상의 이사는 없기를 바라는 포부를 담은 페이지. 해서, 앞으로 쓰게 될 글 모음집의 제목은 이게 어떨지 싶다. 끝사랑 찾기는 반쯤 포기했으나, 대신 끝집을 짓게 된 조 여인의 '끝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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